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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일기 -'자비도인' 수월선사2

암자일기

by 문성 문성 2010. 1. 1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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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무식이어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문도 써지 못했던 수월은 이날부터 사람이 변해 있었다. 불망념지의 신통력을 얻은 후 부터는 어떤 경전이나 문장도 막히는 게 없었다. 한 번 보고 들은 경전이나 문장은 모두 기억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4월 초파일 때 신도들이 원하는 바를 축원하기 위해 신도의 가족 상황을 듣기만 하고 법당에서 이름과 순서 하나 틀리지 않고 부처님에게 축원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는 대가족제여서 보통 한 가족이 20여명의 이름을 축원했다. 절 신도가 수백명이면  수 천명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데 스님은 이름을 다 기억하셨다고 한다.  

 

수월은 깨달음을 얻고 틈틈이 스승 경허로부터 짚신 삼는 기술을 배웠다. 나중에 수월은 북간도에서 머물 때 수많은 동포들에게 짚신을 삼아주었다.

수월은 평생 울력과 묵언, 하심의 수행에 철저했다. 간혹 큰 절에서 조실로 모셔걌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한 동안 스님은 유점사 마하연에서 조실로 계셨다. 그 때 있었던 일이다.

스님은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수행에 정진하셨다. 절에서 가꾸는 채소밭이 있는데 맷돼지 피해가 심했다. 그래서 수월 스님이 채소밭을 가꾸고 돌보자 맷돼지와 벌레 들의 피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어느 날 공양주가 무가 너무 잘 자라 먹음직스럽자 몰래 무를 하나 뽑아 먹다 턱이 빠지고 말았다. 그날 밤 공양주 꿈에 산신이 나타나 꾸짖는 게 아닌가.

“ 그 무를 누가 가꾸는데 감히 함부로 손을 대다니”

공양주는 이튼날 새벽 수월 스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수월 스님이 그말을 듣고 산신각으로 올라가 말했다.

“뭐 그깐 일로 그래. 좀 봐주게나”

그러자 공양주의 빠진 턱이 금새 나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경허의 세 달중 상현달이 되어 20여 년간 북간도에 머물면서 나라를 잃고 떠돌던 조선 민초들에게 묵묵히 짚신과 주먹밥을 만들어주며 살았다.

수월은 자비로웠다. 특히 천수경을 좋아해 평생 천수경을 외우면 살았다고 전한다.

스님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오도송이나 열반송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북간도에서 작은 초막을 짓고 손수만든 짚신과 주먹밥을 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가져 가도록 했다는 것만 전해온다.  스님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월스님 주변에는 만주 들판의 사나운 짐승들도 순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산으로 돌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스승 경허 선사가 입적하자 세 제자의 반응이 달랐다고 한다. 수월은 크게 웃었다. 혜월은 춤을 추었으며 만공은 울었다.  수월은 스승이 이제 세상 인연을 끊고 극락으로 가셨으니 좋아서 웃었고, 혜월은 극락간 것을 축하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스님은  74세로 입적했다. 개울에서 몸을 정갈하게 씻은 후 짚신을 머리에 이고 열반에 들었다. 스님을 다비하고 다음날 마음 주민들이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더니 남쪽으로 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2009년 5월 27일 그가 생활했던 옌지(延吉)시내에 큰 행사가 있었다. 바로 수월정사 개원식이다. 이날 참석한 조계종 지관 총무원장은 “구름을 벗어난  달은 백개, 천개, 만개의 강에 비칠수 있다. 수월 스님은 그렇게 강게 비친 달의 실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그해 10월26일 스님이 토굴생활을 하던 중국 길림성 도문시 일광산에 수월정사 착공식(사진 아래)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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