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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위원회2012/01/27 17:39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사진. 연합뉴스). 그도 이젠 지는 꽃이 됐다.


방통대군. 실세중의 실세. 이명박대통령의 멘토, 이정부 출범의 절대공신인 6인회 멤버 등 그에 대한 수식어는 많다.


그의 무대등장은 화려했다. 기대도 컸다. 방송과 통신을 합친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자리는 처음에 국무총리급 위원장이라고 부러워했다.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다.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는 합의제 조직의 한계였다. 최 위원장도 국민의 기대에 크게 미흡했다.


갈등속에 그의 퇴장은 쓸쓸했다. 자신의 말처럼 참담했다. 최시중 위원장에게 영화는 사라지고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로 불리던 최 위원장은 2008년 3월 방송통신위원회 설립과 동시에 초대 위원장에 취임, 3년10월간 장기 재직해 오면서 방송통신 정책을 주도해 왔다.

 

그는 최근 불거진 측근 비리 의혹에 대한 책임을 지고 27일 전격 사퇴했다. 얼마전까지 야당의 퇴진요구에 그는 물러날 뜻이 없었다. 그는 이명박 정부와 운명을 같이 할 인물로 생각했다.

 

최 위원장은 이날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방송통신위원회 기자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 초 제 부하 직원이 금품 비리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보도가 크게 나왔다"면서, 검찰이 제기된 의혹을 밝혀내지 못 했지만 이에 책임을 지고 떠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저로 인해 방통위 직원들의 자긍심에 상처를 줬다"면서 "참담한 심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참담한 것은 정작 국민이다. 최 위원장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럽지 않다면 사퇴할 일이 아니다. 이미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만큼 지켜보면 될 일이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쏠리는 각종 의혹에 대해 결백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검찰의 수사여부에 따라 그도 검찰에 불려가야 할지 모른다. 말년에 이 무슨 꼴인가. 그는 한탄할 것이다.

 

최시중 위원장은 현 정부가 출범한 지난 2008년 3월 제1대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최 위원장이 방송통신위원장으로 거론되면서 취임 전부터 방송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격 논란에 휩싸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의지대로 그를 위원장에 임명했다.

 

당시 최 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생을 걸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방통위를 편파적으로 운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방통위를 편파적으로 운영하지 않겠다던 최 위원장의 발언은 미디어법 통과와 관련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이어 지난 2009년 7월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직권 상정으로 통과된 직후에는 종편 사업을 놓고 끊임없이 특혜 시비를 불러왔다. 1기 임기 수행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매일경제 등 4개 신문사를 종편 사업자를 선장하고 채널 배정 작업은 2기로 넘겼다.

 

2기로 임명되기까지의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종편 선정 과정에서 특혜와 편파 심사 의혹과 함께부동산 투기, 증여세 탈루, 아들 병역특혜 등에 휩싸였다. 그러나 각종 비리 의혹에도 지난 2011년 3월 결국 2기 위원장직에 연임됐다. 이후에는 종편에 15~18번 등 앞번호 채널을 배정하면서 또 다시 특혜 의혹에 시달렸다.

 

최근에는 최 위원장이 정 전 보좌역을 통해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돈봉투를 돌렸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3년6개월만에 방송통신위원장직을 사퇴했다.


그가 지휘한 방통위는 결국 시한부 인생이나 같다. 여야는 이구동성으로 정보통신부 같은 독임제 조직 부활을 정책대안으로 제시했다. 정보통신은 사라지고 온통 방송만 가지고 아옹다옹하다 막을 내리게 되는 신세가 됐다. 그의 몰락은 방통위의 좌절이다. 이 정부의 조직개편의 실패작이다. 이미 방통위 1급이나 국장급 등이 명분은 후진에게 길을 터주기 위한 용퇴라며 보따리를 싸고 있다. 곧 이어 몰아닥칠 미디어랩과 종편사업자 선정 등에 대한 정치적 폭풍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지적이 많다.


이미  1급에서 물러나는 방통위 노영규실장은 민간단체로 가기로 내정이 됐다. 최위원장은 자신도 불명예 낙마했지만 방통위라는 조직도 존폐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이제 방통위는 차기 정권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최 위원장이야 물러나면 그만이지만 잘 나가던 정보통신산업을 갈기 갈기 찢어놓고 시들게 한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권불4년이 그에게는 멍에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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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하지만 관운(官運)의 여신은 강봉균 에게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1993년 12월1일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실무대표단장으로 활동했다.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됐다.


당시 쌀개방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나 같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후보시절 1992년 11월23일 유세장에서 “쌀은 절대 개방되면 안됩니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은 개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공약한 상태였다.


이 공약은 김영삼 정부의 족쇄가 됐다. 쌀시장 개방은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강 실장이 해결사로 총대를 멨다. 강 실장은 각계전문가 20여명과 밤을 세워 토론하며 안을 만들었다. 강 실장은 11월말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박재윤 경제수석등이 배석한 가운데 쌀시장개방 대책을 보고했다. 한국도 최소시장을 개방하고 개방기간을 최대한 유예하되 국민 수요의 1-4%를 수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 대통령은 강 실장의 보고에 대해 만족감을 나타냈다. 강실장은 제네바로 날아가 실질적인 UR협상을 지휘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강 실장은 그해 12월28일 노동부차관으로 승진했다. 이어 1994년 10월6일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됐다. 3개월여만인 그해 12월26일 다시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관자리만 3번째 였다. 김대통령은 그해 12월23일 정부조직개편에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출범시켰다.


강봉균 장관의 회고.


“ 청와대 지시를 받아 두 부처를 통합하는 작업을 했어요. 작업이 순탄할리 없었어요. 파란곡절을 겪으며 기구와 인력 등을 확정했어요. 출범하는 통합부처 차관은 제가 가는 걸로 청와대에서 언질을 줬고 그래서 실무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사발령이 안나요. ‘이상하다. 이거 무슨 일이 생겼구나’했어요. 12월27일 청와대에서 차관인사 발표를 앞두고 3시간동안 격론이 벌어졌다고 해요. 저의 차관 임명을 놓고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는데 결론은 총리행조실장으로 보내기로 했다는 겁니다.“


정부는 행정조정실장의 위상을 대폭 강화했다. 과거 행정조실장은 차관회의 멤버가 아니었다. 그가 행정조정실장으로 가면서 차관회의 의장을 맡았다. 행정조정실장은 감투가 10개가 넘었다. 그는 정보화추진위원회 실무위원장으로 정보화촉진기본법과 정보화기획실설치, 정보화촉진기본계획 입안 과정에서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면서 정보화 기반을 구축하는데 조정자 역활을 했다.


그는 행정조실장시절 집을 반포에서 총리공관에서 가까운 청운동으로 옮겼다. 그는 아이디어가 넘처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 맡은 일은 줄줄 꿰고 있어 ‘빠꼼이’로도 불렸다. 이수성 총리는 “강실장 같은 공무원이 있는 줄 몰랐다”고 격찬했다.


그는 학구열이 강해 미국 월리암즈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를, 그리고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심없이 소신껏 업무를 합리적으로 추진한 결과는 장관 발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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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방송통신위원회2012/01/20 08:41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사진)이 19일 기자간단회에서 “집권하면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를 부활하겠다”고 밝혔다.

 

박 위원장은  이날 오찬간담회에세  기자들이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를 부활하고 과기부총리를 두겠느냐'고 묻자 "네, 어쨌든 거기에도 컨트롤타워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민주당은 집권하면 정보미디어부를 신설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어 차기 정권에서는 어떤 형태건 합의제인 방송통신위원회체제를 독임제 형태로 개편할 것으로 본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12월13일 과기 17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주최한 '대한민국과학기술대연합' 출범식 때의 '과학기술 전담부처 적극 검토' 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간단회에서 발언은 확정적이다.

 

박 위원장은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에도 그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과학기술의 융합과 산업화를 통한 창의국가 세미나'를 열고 과학기술 부처 신설을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앞으로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과학기술 정책의 추진을 위해 현재 제 역할을 못하는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최상의 위치를 갖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정보통신업계는 정부에 IT컨트롤타워 싡설을 강력히 요구했으니 정부는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여야가 공히 정통부 신설을 밝힘에 따라 차기 정권에서 정통부와 과기처 부활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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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정통부 새 수장(首長)인 강봉균 장관(사진)은 누구인가.

그는 고난을 딛고 성공한 엘리트경제관료다. 그는 지역차별이 상존하던 영남출신 대통령 정부에서 최고의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3.4.5.6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주도했다. 그는 일에 관한한 똑소리가 났다.


강 장관은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나 군산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뒤늦게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강봉균 장관의 말.


“5.16군사정변이 나던해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어요. 혁명공약에 국민의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게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경제를 공부해 국가빈곤을 타파해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2000년에 펴낸 그의 자서전 ‘초등학교 교사에서 재경부장관까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무렵 나는 재건국민운동의 청년회와 부녀회 지도교사로 활동하면서 농촌 근대화 현장에 있었다. 박 대통령이 초등학교 교사 3년만에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도 대학진학의 결심을 굳혔고, 마침내 독학으로 1964년 서울상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해인 1969년 행정고시 6회에 합격,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강 장관은 사무관시절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해 기획능력을 인정받았다.


그후 4차,5차,6차 등 4번이나 경제개발계획 입안을 주도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개발시대 ‘최고의 보직’이라는 경제기획국장을 두 번씩이나 맡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강 장관과 이석채 청와대경제수석(현 KT회장), 한이헌 전 청와대경제수석(15대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장) 등을 경제기획원의 트로이카로 불렀다.


전두환 정부시절인 1985년부터 4년간 경제기획국장으로 장수하면서 10%이상 고성장과 3%수준의 불가안정, 국제수지 흑자라는 3마리 토끼를 잡는데 기여했다. 그가 모신 경제부총리만 해도 신병헌, 김만제, 정인용, 나웅배씨 등 4명이나 됐다.


경제부총리가 바뀔때마다 경제기획국장 교체여부가 관심이었다. 하지만 4명의 부총리는 강국장은 바꾸지 않았다.

그는 1990년 4월3일 두번 째 경제기획국장으로 발령났다. 노태우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금융실명제 도입을 철회하자 한이헌 국장이 물러난 후였다. 두번 째 경제기획국장 재임기간은 한 달도 안됐다. 그해 5월1일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승진했다. 관례를 벗어난 파격적인 승진인사였다. 그는 차관보로 4년간 일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정권이 교체돼도 그는 차관보 자리를 지켰다. 이도 기록이었다.


그는 한국경제개발의 전도사로 개발도상국에 성공사례를 널리 전파했다.


강봉균 장관의 설명.


“당시 외교부를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의 개발성공 요인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한국에 온 개도국 국회의원이나 관료 들을 대상으로 2-3시간씩 성공사례를 소개했습니다. 1991년에는 중국 정부초청으로 중국에서 국장급 이상 관료들을 대상으로 2일간 경제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오전에는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자유토론을 했는데 그당시 국장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1992년에는 베트남에 가서 역시 경제교육을 했어요. 대단히 자랑스럽고 보람이 컸습니다. ”


그는 원칙과 소신에 충실했다. 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사례하나. 1980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할 무렵, 각부처에서 엘리트를 차출했다. 그는 차출 대상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서슬퍼렇던 시절에 상상못할 일이었다.


두번째 사례. 차관보로 잘 나가던 그는 1993년 5월23일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밀려났다. 차관으로 승진해야 할 그로선 사실상 좌천이었다. 당시 실세였던 박재윤 청와대경제수석(통상산업부장관. 부산대학교총장 역임)과의 정책충돌 때문이었다. 그는 박수석과 호형호제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공적 소신은 사적 인연을 뛰어넘었다.


김영삼 정부시절 박 경제수석이 강차관보에게 ‘신경제 5개년계획안’수립을 주문했다.

그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있는데 무슨 신경제계획인가”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작성지침을 만들어 청와대로 올라갔다. 국장급 비서관들이 보는 앞에서 박수석과 강차관보는 계획안을 놓고 격론을 벌었다. 그 핵심은 금융개혁이었다. 강차관보는 “금융개혁없이는 신경제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경제수석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고 맞섰다. 강차관보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충돌했다.


강봉균 장관의 증언.


“박 수석에게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라. 나는 못하겠다’고 소리치고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한달 동안 그 일을 안했어요.”


한 달여가 지난 어느날 퇴근 무렵, 이경식 부총리(한국은행 총재역임)가 강차관보를 집무실로 불렀다.

“청와대와 상의했는데 강 차관보를 교체할 수 밖에 없어요”


그는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발령이 났다. 청와대의 눈밖에 나면 그만둬야 했지만 그의 능력이 그의 지키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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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미디어. 매스컴2012/01/12 16:32


명진스님이 거듭 MB정부를 비판하며 독설을 쏟아냈다.


명진스님은 11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에서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중생이 아프면 부처도 아프다 - 서이독경’ 북콘서트(사진)에서  명진 스님은 “전과가 있고, BBK 사건이 나오는 데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는 걸 보고 걱정이 앞서더라. 내가 4년 전에 ‘허언필망’이라고 예언 했었다.”면서 “최근 우리나라를 보면 비서관 중심제 같다. 비서들이 실세인 것 같다. 비서가 돈 받아먹고 마치 비서 공화국 같다. 또 거짓말을 막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있는 형국이다. 마치 ‘이열치열’처럼 ‘이비치비(以非治非)’ 같다”고 비판했다.


방송인 김미화씨의 사회로 진행한 개그토크에서 명진스님은 “죄의 근원은 욕심이다. 욕심을 채우려면 거짓말하고 못된 짓을 하게되어 있다. 이제는 그만해야 하고 부자 되는 것만 보고 달려온 우리, 이제 웬만큼 사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고르게 살면서 무엇으로 살 것인지 고민하면서, 철학적 성찰하는 세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으로 사는 삶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거짓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양심 있는 세상으로 한발 씩 디디는 해가 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명진스님은 “박원순, 문재인, 안철수 같은 분을 정치 일선에 나서게 하고, 2030세대를 정치에 참여하게 한 각하의 업적을 찬양한다”고 MB를 맹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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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이현덕의 책마당2012/01/11 12:00
 

이명박 정권과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종교인이라면 단연 서울 봉은사 전 주지 명진스님이다. 그는 MB정권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해 왔다. 그의 거침없고 직설적인 말은 늘 세상을 달구었다.

 



명진스님의 수행에세이 ‘스님은 사춘기(사진)’는 2011년 4월에 출간했다. 최근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명진 스님이 일요 법회 때마다 신도들에게 한 법문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 고뇌 끝에 해인사로 출가하게 되었던 이야기부터 이후 40년 동안 구도의 길을 걸어 온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었다.

 

이 책을 통해 스님의 거침없는 일상을 알 수 있다. 스님의 도반조차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하고싶은 대로 말한 스님”이라고 할 정도다. 그는 세상살이에 거침이 없었다.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 성철 스님 아래서 1년여 행자생활을 하다 계를 받기 전에 도망쳐 법주사에서 출가했다. 선방에서 공부하면서 자칭 깨닫았다고 자만해 성철, 송담 등 당대의 선객들을 찾아 다니며 법거량을 했다.

친구 여동생과의 연정, 도반을 위한 소머리를 구해 삶아 먹인일, 스님 다비식에서 유행가를 부른 일, 민주화로 인해 감옥살이 했던 일, 그리고 지관총무원장 재임시 강남 부자절인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일 등이 소상히 담겨 있다.


봉은사에서 1000일 기도중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로 인해 산문을 나갔던 일과 불전공개 등도 소개했다.

 

성철스님과 그는 늘 겨뤄보고 싶었다. 뭔가 깨닫아야 조바심이 그를 채근했다. 드디너 기회가 왔다. 어느날 성철스님이 해인사 법당에서 법문을 할 때 일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법상위의 성철스님을 향해 물었다.



“성철의 목을 한칼에 쳐서 마당 밖에 던졌습니다. 그 죄가 몇근이나 돼겠습니까?”

“백골연산(白骨連山)이다”

“예? 뭐라고요?”

“시끄럽다. 앉아라. 저노무 자슥, 열아홉 살 행자때부터 알았네 몰랐네 하고 다니더니 아직도 저러나. 사기꾼 갚은 놈”


그날 성철스님은 법문 내내 ‘저놈이 어떻고 저떻고’하면서 야단을 쳤다고 한다. 그날 그는  죽사발이 됐다.

 

그는 이 책에서 인과를 강조했다.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아 생사가 끊어진 대자유, 대해탈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종교가 복을 구할게 아니라 지혜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진 지음. 이솔 펴냄. 277쪽. 가격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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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1996년 8월8일 목요일.

청와대비서실은 아침부터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휴가중인 이수성 국무총리(새마을중앙회장 역임 .현 통일을 위한 복지기금재단 이사장)를 예정에 없이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 했다. 관가(官街)에 개각설이 안개처럼 퍼졌다.


오전 1시경 김 대통령은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환경부장관. 국회의원 역임. 현 재경일보회장)을 집무실로 불러 개각명단을 넘겨주었다.


윤 대변인은 1시반 경 청와대 기자실로 내려와 “김 대통령은 오늘 부총리겸 재경경제원장관에 한승수 전 대통령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을 임명하는 등 6개 부처의 개각을 단행했다”고 발표했다.


김대통령은 정보통신부장관에 강봉균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사진.재경부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을, 과학기술처장관에 구본영 청와대경제수석(작고), 청와대경제수석에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현 KT회장)을 각각 임명했다.


개각이 발표되자 휴가중이던 이석채 정통부장관은 이날 오후 4시경 급히 정통부로 나와 5시에 이임식을 갖고 정통부를 떠났다.


이석채 장관의 회고.


“당시 저의 경제수석 임명에 청와대안에서 반대 기류가 있었어요. 제가 경제수석이 되면 소신파인데다 직설적인 성격으로 수석 간에 갈등을 빚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는 것입니다.”


강봉균 장관은 언제 누구로부터 내정을 통보받았는가.


강봉균 장관의 회고.


“이수성 국무총리가 그날 청와대 오찬이 끝난 후 돌아와서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동안 수고많았다. 축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 장관이 처음 통보받는 자리는 정통부가 아닌 과학기술처장관이었다. 그런데 청와대 발표를 보니 정통부장관이었다. 인사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차관자리만 3번을 거쳐 입각 0순위인 그를 서열이 낮은 과기처장관에 임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청와대 비서실 의견이 반영돼 막판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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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이현덕의 책마당2012/01/09 12:19
 

 
과연 어떤 내용이길래 베스트셀러에 올랐나 싶었다. 닥치고 정치(사진). 뒤늦게 읽고보니 그럴만했다. 겉으로 고상한척 하는 정치와 제잘난 맛에 사는 정치인들을 치밀한 분석력을 토대로 박살내고 있었다. 
그것도 누구나 알수 있는 일상어를 사용했다. 반말에다 비위에맞지 않으면 말끝에 비속어가 등장했다.  정치불신이 극해 달해있는 이들에게 속이 후련할만 했다.



 
“쫄지마, 씨바. 조또, 졸라. ”

 

첫장 부터 직설적이다. 비속어도 무시로 등장한다. 그뿐이 아니다. 등장인물도 이름뒤에 씨나 직책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냥 이명박이고 각하도 ‘가카’다. 박근혜나 문재인, 안철수, 손학규, 유시민 에누리 없다.

 

‘닥치고 정치’는 언어자체가 반말투다. 고상한 말대신 일상어로 쉽게 정치현상을 분석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비판의 대상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BBK와 다스 등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대통령의 형님인 이상득 의원도 빼놓지 않았다. 노무현과 노빠, 손학규 등도 피해 갈 수 없다.

 

유시민·심상정·이정희·노회찬·박근혜 등 정치인의 실명 비판도 거침이 없다. 한 때 잘나갔던 국가과학자였던 황우석에 대한 언급도 들어있다.

 

그래서 인가. 이 책은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다. 이 책은 인터뷰어 지승호가 묻고 딴지일보 김어준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둘다 반말이다.


김어준의 대답내용이 독자의 주목을 끈다. 그 정치현상에 대한 분석력과 통찰력, 비꼬는 투의 어투가 독자를 흥미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는 직설적이다. 어둘러 말하지 않지만 상대가 금새 알아듣게 쉽게 말한다. 마치 친한 친구사이에 술잔을 앞에 놓고 현실을 놓고 대담하는 듯한 내용의 책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자기 욕망에 투표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모든 게 사사로운 '가카'에겐 국가도 재테크 수단이다. 세계공항서비스평가에서 6년 연속 1등을 하고 연간 3000억원 이상의 당기순이익을 올리는 인천공항을 가카 형님의 아들이 대표이사로 있는 호주의 '맥쿼리'에 팔려 한다.

 

박근혜에게 국가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그런 그녀를 지지하는 것은 유비가 유방의 후손이란 이유만으로 그를 옹립했던 삼국지 시대의 정신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진보가 그녀를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연좌제일 뿐이며 박근혜 지지층이 그 말에 돌아설 사람들도 아니다. 오히려 드러내야 할 것은 그녀가 대중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생활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김어준은 책 끝장에서 해보자. 쫄지말자, 가능하다. 씨바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하겠다고 했다. 그게 뭔가하고 책장을 넘겼더니 ‘나는 잘생겼다 크하하하.’였다. 이런 씨바. 

 

김어준 지음/지승호 엮음/푸른숲 펴냄. 329쪽 가격 1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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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방송통신위원회2012/01/06 18:57
 

5일 오전 11시 57분.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장.

당초 개회시간인 10시를 2시간여 지나서 회의가 열렸다. 곧바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전 정책보좌역 정용욱씨가 연루된 금품수수 비리 의혹이 도마위에 올랐다.

 

최 위원장(사진)이 나서서 먼저 유감을 표명했다.

최위원장은 “방통위가 선임한 한 EBS 이사 개인 비리로 구속된데 대해 사과하고 책임감 느낀다. 금품 수수 의혹도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사실 여부 떠나 깊은 유감의 말씀 드린다. 모든 것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최 위원장은 “ EBS 김학인씨는 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표결절차 거쳐 선임됐다. 이 과정에서 금품수수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퇴직한 정책보좌관 관련 사안 등 여러 의혹에 대해서는 검찰 수사 통해서 시비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각 미디어에서 다양한 의혹 제기되고 있지만 저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수년동안 방송통신 위원회 주변에서 설로 나돌던 것이 지금 철 만난듯이 제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특정업자가 어떻게 했다 부동산 투자했다 등등의 문제는 저로서는 가슴아픈 문제이고 제가 알기로는 진실과는 너무 거리 먼 것으로 알고 있다. 검찰 당국에서 수사해야 될 것이고 거기서 진실 밝혀지면 좋겠다. 진위 여부 떠나 심려끼친데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드린다.”고 의혹에 대해서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밝혔다.


방통위는 이에앞서 3일 해명자료를 내놓고 최 위원장측 억대수뢰보도는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최 위원장이 최악의 위기에 몰렸다. 사실여부는 검찰이 밝혀줄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김학인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이사장이 EBS 이사로 선임되는 과정에서 최 위원장의 측근인 정씨에게 억대 금품을 건넨 혐의를 포착, 수사중이다. 검찰이 최 위원장의 정부내 막강파워를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검찰이 정씨의 수뢰혐의를 포착해 수사중이라면 최위원장의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정신적 멘토로서 이 대통령의 형님인 이상득 의원과 권력실세중의 실세로 불렸다. 처음 그가 방통위원장으로 취임당시 그에 대해서는 기대반 우려반이었다. 방송과 통신정책을 총괄하는 수장으로서 총리급 위원장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서 방송이나 통신분야에서 그에 대해 거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수장인 방통위는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는 맥없는 부처로 추락했다. 독임제가 아닌 합의제 위원회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더욱이 미디어랩과 종합편성허가를 놓고 정치적인 갈등속에 통신분야는 뒷전으로 밀렸다. 제4이동통신사업자 선정도 변죽만 올리다가 무산된 상태다. 정보통신분야는 데려온 자식처럼 겉돌았다. 세계에서 주목받던 ICT강국의 위상은 날로 추락했다.


오죽했으면 야권의 유력대선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지난해 “ 잃어버린 IT3년”이란 말까지 했다. ICT컨트롤타워가 시급하다는 여론에 최위원장도 동의했다. 그는 지난해 3월 편협초청 토론회에서 “정통부 해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위원장은 이를 바로잡는데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3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연임했다. 이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는 유일한 각료로 남을 것이다. 그가 야당측의 사퇴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그렇다.

 

방통위는 차기 정권에서 존립이 위태롭다. 여야를 가릴 것없이 독임제 성격의 부처를 신설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다. 야당은 이미 정보미디어부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상태라면 방통위는 파산선고를 받은 시한부 조직이다. 그렇다고 방통위가 조직개편에 대비해 작업을 심도있게 하는 것도 아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조직개편을 검토하겠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사전적 대응을 하지 못했다. 방통위 내부 조직도 속칭 전투력을 상실했다.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는 조직이 됐다는 평이 많다. 더욱이 1급이 되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옷을 벗었다. 최위원장은 물러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조직은 어떻게 되는가.   

 

방통위는 수없이 ‘존재감없다’ ‘유명무실한 조직'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최위원장은 그동안 나름대로 몸조심을 해 왔다. 하지만 그 모든게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다.최위원장은 KBS수신료와 종편, 미디어랩 등 언론간 이해가 걸려 있는 일까지 겹쳐 앞날이 첩첩산중의 처지다.


최위원장은 특히 ICT진흥과 관련해 최위원장은 할말이 별로 없을 것이다. 정부가 정책판단을 잘못하면 국가미래를 망치는 일이다. 최위원장은 정책 잘못을 알면서도 이를 외면했다. 그 결과는 ICT분야의 추락이었다. 최위원장은 대통령에게 개선책을 강력히 건의해 관철시켰어야 했다. 대통령의 정신적 멘토로서 대통령이 잘못했다면 이를 바로 잡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MB정부의 성공이 곧 최위원장의 성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위원장은 지금 막다른 골목에 서 있다. 그가 데려왔고 주변에서 최위원장의 ‘양아들’로 불리는 정씨가 수뢰의혹을 받는 현실에서 최위원장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검찰수사 후 이제 그가 자신의 거취를 어떻게 결정할지가 관심이다.  방통위는 유명무실하고 그 수장인  최위원장마져 최측근의 비리의혹을 산다면 방통위가 뭘 할 수 있을까. 몸조심하다 올해를 다 보내지 않을까. 이래 저래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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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정통부는 그해 10월 정보화촉직기본계획 1차 시안을 작성해 정홍식 실장 주재로 11월 정통부 회의실에서 관계부처 실무자 회의를 열었다.


1995년 12월과 1996년 1월에 정통부 인사로 정책심의관에 서영길 국장(정통부 우정국장, TU미디어 사장 역임, 현 IGM세계경영연구원장)이, 정보정책과장에 정경원 과장(우정사업본부장 역임.현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이 발령나면서 업무라인에 변동이 있었다.


기술기획과장으로 옮긴 류필계 과장의 증언.


“기본계획의 골격을 마련해 후임인 정경원 과장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각부처에서 정보화에 대해 잘몰라 정통부가 주도적으로 안을 만들었습니다.”


정통부는 1996년 들어 한국전산원(현 한국정보사회진흥원 )과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전문인력을 파견받아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한국전산원에서 황종성 박사(현 서울시정보화 기획단장)와 통신개발연구원에서 최수혁박사(KISDI연구위원. 스트라베이스대표 역임)가 이 작업에 가세했다. 이들은 서울 광화문우체국 7층 사무실에서 주로 작업을 했다.


정경원 과장의 회고.


“기획안 작성과정에서 각 부처가 무엇을 할지 잘 몰라 정통부에서 이런 일을 하라고 해당부처에 제시했습니다. 이석채 장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획통이어서 실무진들이 장관 마음에 드는 기획안을 작성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실무반은 해외 사례와 세계 IT관련 리포트를 구해 모두 읽었다. 외국사례를 참고해 안을 만들고 각 부처와 협의를 진행했다.


김영수 사무관의 말.


“저는 처음부터 이 업무만 담당했습니다. 2년여 이 일을 했지요. 1년 중 거의 절반은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계획안을 만들어 밤을 새며 토론을 하고 내용을 보완했습니다. 각부처 계획을 총괄해 이를 편집하고 교열까지 보면서 계획서를 만들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기획안을 작성해 금요일 보고한 후 다시 지침을 받아 주말도 없이 수정작업을 했습니다. 실무회의와 부처협의회에 배석해 나온 의견을 계획서에 반영했습니다.”


김사무관과 황종성 박사는 동년배여서 호흡이 잘 맞았다. 업무는 홍박사가 정보화촉진과 통신망분야를, 최박사가 정보통신산업육성분야를 맡아 계획서 초안(草案)을 작성했다. 여름에는 작업하다 책상위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깐씩 눈을 붙였다.


황종성박사의 증언.


“저는 1995년 11월부터 계획안 작업반에 참여했습다. 부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계획안을 작성했는데 힘은 들었지만 큰 보람이었습니다. ”

실무작업반은 각부처 부문 계획을 종합해 1996년 2월 2차 시안을 작성했다.


그해 3월 26일 이계철 정통부차관(한국통신 사장 역임. 현 KT동우회 회장)주재로 관계부처 1급회의를 열어 계획안을 논의해 시안을 발표했다. 회의에서 거론된 다소 미흡한 사항은 관계부처 협의를 통해 보완했다.


정홍식 실장의 회고.


“나중에는 각부처별로 관련사업을 10대 과제에 서로 포함시킬려고 경쟁이 치열했어요. 환경부는 환경전산인력을 , 건교부는 SOC분야를 , 내무부는 토지, 주민등록 발급 정보시스템 추가 구축 ,법제처는 전자정부 구현분야 중 법원종합법률센터 추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은 부처간 협의와 사업별 면밀한 검토를 거쳐 최대한 추가했습니다.”


그해 5월16일 국무총리실에서 강봉균행정조정실장(정보통신부장관. 청와대 기획. 경제수석. 재정경제부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 주재로 각부처 차관회의를 열어 계획안을 논의했다.


그해 6월4일. 정보화추진위원장인 이수성 국무총리는 정보화추진에 대한 민간의견 수렴을 위해 구성된 정보화추진위 자문위원회 위원 21명에게 위촉장을 주었다. 민간위원장은 장수영 포항공대(현 포스텍)총장이 맡았다. 위원은 ▲강창언 연세대교수 ▲고건 서울대교수 ▲김성희KAIST교수 ▲구자공 KAIST교수 ▲김재전 전남대교수 ▲정재영 성균관대교수 ▲황종선 고려대교수 ▲양승택 ETRI소장 ▲이진주 생산기술연구원장 ▲김영태 LG-EDS고문 ▲박성규 대우통신회장 ▲이동훈 생산성본부회장 ▲박한규 연세대교수 ▲이돈희 교육개발연구원장 ▲김재혜 주택산업연구원 ▲김종길 국방정보체계연구소장 ▲원동호 성균관대교수 ▲신영무 변호사 ▲이기호 이화여대교수 ▲변도은 한국경제신문주필이었다.


정보통신부는 이날 정보화추진자문위원들에게 정부안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이계획안은 6월11일 정보화추진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됐다.


김영수 사무관의 말.


“제 공직생활에서 이 계획안을 만든 것이 가장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윗분들이 믿고 인력을 지원해 주고 기다려 준 덕분이있습니다. 이 작업을 하던 1996년 3월 서기관으로 승진해 이 일을 끝낸 후 자리를 옮겼습니다. ”


기본계획의 목표는 2010년까지 3단계에 걸쳐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전자정부구현 등 정보화촉진 10대 중점과제 추진, 초고속정보통신망 조기 구축및 정보통신산업 기반조성 등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단계(96∼2000년)는 정부의 선도투자로 정보화촉진 기반을 조성하고 2단계(2001∼2005년)는 개인생활의 정보화 산업정보화를 중점추진, 정보활용을 확산시키며 3단계(2005∼2010)에는 사회전분야의 정보화와 세계정보유통의 거점화를 통해 정보활용을 고도화하기로 했다.


정부가 추진할 10대 중점과제는 ▲전자정부구현 ▲교육정보화기반구축 ▲학술.연구정보이용환경 조성 ▲정보화촉진을 통한 기업경쟁력 강화 ▲정보화를 통한 사회간접자본시설의 활용도 제고 ▲지역정보화 지원 ▲정보기술을 활용한 의료서비스 고도화 ▲환경관리의 정보화 ▲국가안전관리 정보시스템 구축▲선진 외교.국방정보 체계확립 등이다. 정통부는 추진과제는 담당기관과 협조기관을 명확하게 정해 정보화 과정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이 계획이 오늘날 ICT강국 구현의 교범(敎範)이 됐다. 미래는 상상력을 설계하는 국민의 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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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붓다 뉴스2012/01/02 23:16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

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


팔십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

팔십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 스님(사진. 뉴시스)이 속세의 허물을 허공속에 날려보내며 친필로 남긴 ‘사세(사진. 辭世)'라는 제목의 임종게(臨終偈)다.

 

지관스님이 2일 오후 7시55분 정릉 경국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80세, 법랍 66세.

 

지관스님은 폐 천식이 심해 지난해 9월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수면 치료'를 받으며 지병을 돌봤지만 고령이라 회복되지 않고 이날 열반에 들었다.

 

1947년 해인사에서 당대 최고 율사(律師)였던 자운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지관스님은 1953년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963년 경남대를 졸업한 뒤 1976년 동국대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합천 해인사 주지, 동국대 총장, 조계종 총무원장(2005-2009) 등을 역임했다.

 

지관스님은 조계종을 대표하는 학승(學僧)으로 꼽힌다. 1991년 사재를 털어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개원한 뒤 1982년부터 불교대백과사전인 가산불교대사림(伽山佛敎大辭林)을 펴내고 있다. 지금까지 13권이 간행됐다.

 
또 역대 한국 고승들의 행적을 밝힌 '역대고승비문총서', 한국불교학연구자 100인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한국불교문화사상사'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문화관광부 은관문화훈장(2001년)을 받고 조계종 포교대상(2001년), 만해대상 학술부분상(2005년) 등을 수상했다. 이밖에 종단교육공로표창(1969년), 서울시 정의사회구현 표창(1982년) 등 수상경력이 있다.

 

지관스님은 2010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앞두고 김해 봉하마을을 직접 찾아가 권양숙 여사에게 염주를 선물하며 위로를 전했고, 노 전 대통령 모역에 놓을 박석에 ‘갔지만 가지 않았네(無去無來亦無住) 국민을 위한 불멸의 그 열정은(一念普觀三世事)’라는 추모글을 남겼다

 

지관스님의 법구는 3일 오전 11시 출가본사인 경남 합천 해인사 보경당으로 이운돼 분향소가 차려질 예정이다. 장례는 7일장으로 치러지며 8일 오전 11시 해인사에서 영결식과 다비식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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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상상력은 미래다.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은 ‘한국판 퓨처플랜’이었다.


그 당시의 기술이란 토대위에 상상력을 더해 ‘ICT강국’의 미래를 설계한 것이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이었다.


1996년 6월11일.

정부는 이날 오전 서울 종합청사 국무위원 회의실에서 이수성 국무총리(새마을중앙회장 역임 .현 통일을 위한 복지기금재단 이사장)주재로 제1차 정보화추진위원회를 열고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을 심의, 확정했다. 제안자는 이석채 정보통신부(현 KT회장)이었다.


이석채 장관의 회고.


“미래는 IT시대입니다. 당시 정보화는 국가경쟁력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가정보화 설계는 시대의 필연이었습니다.”


정보화촉진기본계획은 2010년까지 5년마다 3단계로 나눠 국가정보화를 실현하겠다는 결의에 찬 국가발전전략이었다.


이 기본계획은 △그동안 각부처 단위로 분산했던 정보화 추진체계를 일원화했고 △그동안 제외했던 민간분야 정보화를 포함시켜 국가개조차원의 종합적인 정보화 설계도였으며 △ 이런 국가정보화를 정보통신부가 총괄키로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1995년 1월. 국가정보화 총괄부서로 출범한 정보통신부는 정보화촉진기본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2010년까지 세계 최고수준의 정보화를 실현한다는 목표아래 그해 2월5일 부문별 계획안을 작성했다.


노태우 정부시절 정보사회종합대책을 마련한데 이어 정보화촉진기본계획 작성을 총괄한 정홍식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사진. 정통부 차관, 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사장)의 증언.


“정통부 출범후인 1994년 12월말 정보통신정책실장과 초고속기획단장 겸임발령을 받은 후 경상현 정통부장관(현 KAIST겸직교수)으로부터 정보화촉진기본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 계획은 크게 정보화촉진계획과 정보통신산업육성계획, 그리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과 여건 정비계획 등으로 구분했어요. 우리나라의 정보화 정책 역시 기술발전과 사회 경제적 변화를 정보화 전략에 반영해 계획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경제기획원의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처럼 정보화는 5년 단위로 정통부가 국가정보화를 총괄해 추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획안의 업무라인은 강상훈 정책심의관(청와대 정보통신비서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과 류필계 정보정책과장(,정통부 정책홍보관리본부장 역임, 현 LG유플러스 부사장) 김영수사무관(현 경인지방우정청장),강성주사무관(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역임. 현 OECD대표부 파견)이었다.


류필계 과장의 말.


“국가 정보화의 근간이 되는 두 가지 작업을 병행했습니다. 정보화촉진기본법과 정보화촉진기본계획입니다. 기본법은 강사무관이, 기본계획은 김사무관이 전담했습니다. 이 가운데 기본법 제정은 난관이 많았습니다. 부처간 협의가 안돼 과천에 있는 통상산업부를 제가 22번이나 방문했고 그래도 정리가 안돼 총리실에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직원들이 장기간 집에 못들어가기가 일쑤여서 가족이 옷을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법은 8월 4일 공포했고 1996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2001년 2월 펴낸 회고록에서 기본법 제정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정보강국을 위해 1995년 8월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했다. 정보화 입국을 위한 법적 뒷받침을 완비한 것이다. 이 법에 근거해 1996년 4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보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해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종합적인 정보화시책을 추진토록 했다.”


정통부는 기본법이 제정되자 정보화촉진기본계획 작성에 속도를 냈다.


정홍식 실장의 회고.


“ 정보사회는 정보활용 능력과 정보통신산업의 발전 정도가 국민 생활질을 결정하고 일류국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민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에서 정보화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정보화는 21세기 무한경쟁시대에 국가경쟁력과 국민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핵심수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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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 칼럼/정치2011/12/31 18:10


 

사람은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은 남아 있다.

 
민주주의의 대부인 고 김근태(64)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사진)이 2009년 6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편지가 뒤늦게 화제다. 그는 3선의원이며 열린우리당 당의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고 김 상임고문의 공개편지는 이게 처음은 아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 등에게 현안이 있을 때면 공개편지를 보내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고 김 상임고문이 이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것은 2009년 6월2일이다.  그 당시는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노 전대통령이 그해 5월23일 새벽 사저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고 이어 5월29일 장례식이 엄수됐다.  

 

김 전 고문은 장례식 며칠 후 공개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대통령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내용은 냉정했다. 김 전 상임고문은 공개편지에서 “전임 대통령조차 정치보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극단적인 상황, 조·중·동과 검찰에게 참을 수 없는 조롱과 야유를 받아야 했던 사람, 투신 말고 다른 탈출구를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사람”이라며 “부엉이바위에 선 노무현 대통령님의 짙은 외로움이 바로 국민의 마음”이라며 “이런 국민의 마음을 알아 달라”고 말했다.


그는 “미디어 관련법 등 다수의 힘으로 관철시키려는, 이른바 MB법들이 국민의 합의로 처리되도록 결단해 더 이상 탐욕스런 조·중·동에 휘둘리지 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공개편지는 결과적으로 이 대통령의 정책에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했다. 여야간 논란속에서 한나라당은 미디어관련법을 통과시켰고 4개 종편이 등장했다. 

 

다음은 공개 편지 전문.

 

이명박 대통령님!

고 노무현 대통령님의 영전에 500만 명이 조문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영정에 절하며 속울음을 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500만 명이 모두 고인의 열렬한 지지자라서 그랬을까요? 저는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에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임 대통령조차 정치보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극단적인 상황, 조·중·동과 검찰에게 참을 수 없는 조롱과 야유를 받아야 했던 사람, 투신 말고 다른 탈출구를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사람,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에서 서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겁니다.

 

끊임없이 구조조정과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 일자리는 없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조차 몽땅 비정규직인 상황, 국민의 80%가 생존 자체를 위협 받고 '실패자'로 매도되는 상황. 이런 상황에 내몰린 국민의 처지와 노무현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러웠고, 고인의 영전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린 겁니다. 이런 국민의 마음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부엉이바위에 선 노무현 대통령님의 짙은 외로움이 바로 국민의 마음입니다. 그 외로움을 대통령님께서 부둥켜안으셔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고, 정치철학도 매우 다릅니다. 살아 온 길도 물론 다릅니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명박 후보를 반대했고, 당신이 당선된다면 국민에게 불행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으로는 당신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마음으로부터 님을 대통령으로 인정한 것은 국민의 선택이 민주주의의 최종판결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정권교체를 두 번 이뤄야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최장집 교수의 충고, '한나라당 후보는 절대 안된다는 건 자기중심적'이라는 서울대 전 총장의 충고, 선거 결과를 부정할 때 예견되는 혼돈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지난 촛불집회 때 '국민을 섬기겠다' '여러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은 촛불이 꺼지는 순간, 돌변했습니다. 약속을 저버리고 검찰·경찰과 조·중·동을 동원해 국민의 입을 막았습니다. 저는 그런 대통령님의 비겁한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은 '민간독재정권'이다"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이런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경찰력과 수구언론의 힘으로 촛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그때 끈 촛불을 국민들의 가슴 속에 다시 피워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이 촛불을 어떻게 끄실 생각이십니까?

 

대통령님 주위에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청와대, 한나라당, 조·중·동 등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다 죽는다" "그나마 있는 지지 세력도 사라지고, 이명박식 개혁의 동력이 사라진다" "물러서는 것은 곧 정치적 죽음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대통령님께서는 다시 공권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한문 앞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분향을 막았습니다. 시청 앞 서울광장을 경찰차로 봉쇄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진심으로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또다시 공안정국을 조성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생깁니다. 갈등과 대립, 투쟁이 광범위하게 시작될 것입니다.

민주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호소합니다. 대통령님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권입니다. 과거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와는 다른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통령님께서 국민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공안통치의 유혹에 빠지면 무서운 재난이 우리를 덮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공안통치의 유혹을 떨쳐버리십시오. 이건 중도실용주도 아닙니다. 지금 결단은 오직 이 대통령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이 대통령님 자신을 위해 결단해 주시길 호소합니다. 우리국민 모두가 그것을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 유족과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대한문을 비롯해서 서울광장 등 그 어느 곳에서든 추모분향이나 추모집회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른바 미디어 관련법 등 다수의 힘으로 관철시키려는, 이른바 MB법들이 국민의 합의로 처리되도록 결단하여 주십시오. 더 이상 탐욕스런 조·중·동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 외로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마음, 너무나 서러운 국민들의 마음을 이명박 대통령께서 받아주셔야 합니다. 국민을 또다시 부엉이바위로 내몰아서는 안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9년 6월 2일 김근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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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사람 IN2011/12/29 22:15




누구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후가 정확하다.

학교법인 두원학원 이사장이자 14대 신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 김찬두 두원그룹 회장(사진)이 27일 오전 7시 15분에 별세했다. 향년 80세.

 

포항서 태어나 1974년 한국디젤기기를 창업, 자동차 산업 발전에 공을 세워 동탑산업훈장(1972년), 은탑산업훈장(1988년)을 받았다. 제14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대한탁구협회장을 맡았다. 두원공대, 안성두원공고를 설립했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오늘 낮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그가 14대 국회에서 통신과학기술위원회소속일 때의 일화를 들었다. 당시 모부처 고위관료를 지낸 분과 점심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다.  그의 부음기사가 화제가 됐다.

 

14대 당시 김 전 의원은 통신과학기술위원회소속이었다. 그 시절, 명절이나 연말이 되면 부처에서 소속 상임위원들에게 촌지를 돌렸다.  장관 등의 판공비를 모아 고위직들이 의원사무실을 찾아가 은근슬쩍 봉투를 전했다.  금액은 50만원 안팍이고 최고 100만원이었다. 그 부처는 의원과 연고가 있는 고위관료 들로 업무를 분담했다. 경상도 출신이라는 지역연고를 감안해 그가 김의원한테 촌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김찬두 의원실에 면담전화를 한 그는 돈봉투를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의사당을 방문했다. 인사를 건네고 봉투를 꺼내 슬그머니 김 의원앞으로 내밀었다.
"이가 뭡니까"
“연말이면 쓸 곳이 많을 것 같아 얼마 안되지만 봉투에 넣었습니다. 작은 성의로 받아 주십시오"
 “고맙긴 한데 내가 기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쓸 돈을 충분합니다. 가지고 가세요”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는 순간 당황했다. 그 무렵, 재벌 의원도 없지 않았지만 돈 싫다는 의원은 없었다. 오히려 금액이 적어 문제라면 문제였다.
“제 체면도 좀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이 봉투를 다시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입장이 곤란한 모양인데 내가 장관한테 전화를 하리다”


그는 별도리없이 돈봉투를 들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의원실을 나오면서 다시 김의원을 쳐다 보았다.
당시 많은 의원 중에서 봉투를 돌려 보낸 국회의원은 그가 유일했다. 다수 국회의원들은 봉투를 받았다. 심지어 일부 의원은 여기 저기 외상 술값이나 음식값을 관련부처에 대신 갚아달라는 이도 있었다. 물론 호랑이 담배피던 과거일이다.  그럴 때 그는 해당부처나 연관이 있는 산하기관에 손을 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전의원은 지난 10월 29일 신라호텔에서 산수연 자서전「이루지 못할 것은 시작하지도 마라」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그는 인연따라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해 다시 세상을 떠났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일화만 남아 그의 삶을 뒷사람이 엿보게 했다. 그도 부음기사를 보고 이해 당사자가 과거 일을 이야기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 고위관료는 자리를 떠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 김 전의원처럼 돈에 관해 철저한 사람이 있어야 정치가 바로 선다. 한나라당이 현 의원 50%를 물갈이한다는데 썩은 물 절반을 바꾼다고 될 일인가. 모두 바꿔야 한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새 인물로 수혈이 되지 않는한 공염불이 될 것이다. 내가 장담한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볼 수 있었다.  대통령의 형인 유력 국회의원 비서관도 10억씩을 만지는 세상이다. 새해는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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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


해가 바뀌어 1990년 2월13일 상오 청와대.


이우재 체신부 장관은 새해 업무계획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상반기중에 대통령이 지시한 정보화사회에 대비한 정부의 중장기조합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이날 “국가기간망 사업은 기관별, 지역별로 산재한 것을 종합해 작은 정부를 구현할 수 있게 해달라”며 “정보사회 진입을 위해 기술개발을 통신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두어 기술자립의 조기 달성에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노 대통령 특장(特長)의 한 단면을 엿볼수 있다. 역대 장관들이 전하는 대통령들의 관심사는 길어야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대통령이 각부처에 지시하는 내용이 많은데다 정치적 현안이 발생하면 대통령의 관심사는 그 쪽으로 쏠려 과거 지시사항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1년여게 걸쳐 지속적으로 정보사회종합대책 수립을 독려했다. 지시한 사항은 부처 장관이 교체돼도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 챙겼던 것이다.


전산망위는 1990년 4월 24일 ‘정보사회종합대책’ 정부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내용은 2000년대초까지 고도정보사회 구현을 통한 선진국대열 진입을 목표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총 52조원(공공지원 5조원)을 투자해 △정보사회기반조성(정보문화확산. 표준화확대. 정보인려개발, 법령정비) △정보화 촉진(국가기간전산망확충, 지역정보화,중소기업정보화, 뉴미디어개발보급,단말기보급 촉진)△정보사회 고도화(정보산업육성,정보기술연구개발강화,정보통신사업진흥) 등 3개분야 12개 중점 과제를 추진하고 이를 위해 범정부적 차원의 정보사회 발전 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투자할 예산 52조원은 천문학적 숫자였다. 이를 계산한 사람은 정보산업육성 분야에서 일한 권오익 씨(한국통신)였다.


김원식 정보산업담당관의 말.


“당시 필요한 예산 52억원을 권오익 씨가 산출했는데 모두 놀랐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안을 놓고 그해 4월27일 오전 9시부터 서울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산.학.연 등의 전문가가 참석한 가운데 통신개발연구원 주최, 전산망조정위원회 주관으로 공개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우재 체신부장관은 격려사를 통해 "대통령지시에 따라 수립되는 정보사회종합대책은 국가사회 전반의 정보화를 통해 그동안 경제개발추진과정에서 발생된 제반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미래정보사회에 대비한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공개토론회는 △1분과 (정보사회기반조성) △2분과 (정보화촉진) △3분과 (정보산업고도화)로 나눠 주제발표를 하고 패널들의 토론 순으로 진행했다. 1분과에서는 정보문화와 정보기술 표준화, 정보인력개발, 정보사회에 대비한 법령정비 등을 다뤘다. 2분과에서 국가기간전산망 확충과 지역정보화촉진, 중소기업 정보화촉진, 뉴미디어 개발보급,단말기보급 촉진 등을 논의했다. 3분과에서는 정보산업육성과 정보기술 연구인력, 정보통신사업진흥책 등을 협의했다.


정홍식 국장의 증언.


“ 이 종합대책으로 그동안 정부가 주도했던 정책을 민간중심으로 추진하고 체신부와 상공부, 과기처 등 관련부처로 분산됐던 정보화 정책을 종합해 범국가적 일원화 체제를 확립하게 했습니다.”


정부는 그해 6월 정보사회종합대책을 확정했으며 그해 9월 이우재 체신부장관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해 범정부차원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이 대책은 ICT혁명의 종합 청사진이자 정보화의 기본 골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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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