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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사의 산증인 ,강봉균 전 정통부 장관 별세

사람들

by 문성 2017. 2. 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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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사의 산증인이자 김대중 정부 당시 구조조정 사령탑이었던 강봉균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131일 오후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항년 74.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경제부장관,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국회의원 3선을 지냈다. 지난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냈고 대한석유협회장으로 재직했다.

강봉균 전 장관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고난을 딛고 성공한 엘리트 경제관료다. 그는 지역차별이 상존하던 영남 출신 대통령 정부에서 최고의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3, 4, 5, 6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주도했다. 그는 일에 관해 똑소리가 났다.

강 전 장관은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나 군산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뒤늦게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자신문 '이현덕의 정보통신부'에서 보도한 강 전 장관에 관한 기사>.

199688일 목요일.

청와대 비서실은 아침부터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휴가 중인 이수성 국무총리(새마을중앙회장 역임, 현 통일을 위한 복지기금재단 이사장)를 예고 없이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했다. 관가(官街)에 개각설이 안개처럼 퍼졌다.

오후 1시경 김 대통령은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환경부 장관, 국회의원 역임, 현 재경일보 회장)을 집무실로 불러 개각 명단을 넘겨주었다.

윤 대변인은 1시반경 청와대 기자실로 내려와 김 대통령은 오늘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에 한승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을 임명하는 등 6개 부처 개각을 단행했다고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정보통신부 장관에 강봉균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재경부 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 과학기술처 장관에 구본영 청와대 경제수석(작고), 청와대 경제수석에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KT 회장)을 각각 임명했다.

 강봉균 장관은 언제 누구로부터 내정을 통보받았는가.

 강봉균 장관의 회고.

 이수성 국무총리가 그날 청와대 오찬이 끝난 후 돌아와서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축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 장관이 처음 통보받는 자리는 정통부가 아닌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다. 그런데 청와대 발표를 보니 정통부 장관이었다. 인사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차관 자리만 세 번을 거쳐 입각 영순위인 그를 서열이 낮은 과기처 장관에 임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청와대 비서실 의견이 반영돼 막판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통부 수장(首長)이 된 강봉균 장관은 누구인가. 그는 고난을 딛고 성공한 엘리트 경제관료다. 그는 지역차별이 상존하던 영남 출신 대통령 정부에서 최고의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3, 4, 5, 6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주도했다. 그는 일에 관해 똑소리가 났다.

 강 장관은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나 군산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뒤늦게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강봉균 장관의 말.

“5·16군사정변이 나던 해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어요. 혁명공약에 국민의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게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경제를 공부해 국가빈곤을 타파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2000년에 펴낸 그의 자서전 초등학교 교사에서 재경부 장관까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 무렵 나는 재건국민운동 청년회와 부녀회 지도교사로 활동하면서 농촌 근대화 현장에 있었다. 박 대통령이 초등학교 교사 3년 만에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도 대학 진학 결심을 굳혔고, 마침내 독학으로 1964년 서울상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해인 1969년 행정고시 6회에 합격,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강 장관은 사무관 시절 3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해 기획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후 4, 5, 6차 등 네 번이나 경제개발계획 입안을 주도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의 산증인이었다. 개발시대 최고의 보직이라는 경제기획국장을 두 번씩이나 맡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강 장관과 이석채 청와대 경제수석(KT 회장),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 교장) 등을 경제기획원 트로이카로 불렀다.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5년부터 4년간 경제기획국장으로 장수하면서 10% 이상 고성장과 3%수준 물가안정, 국제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데 기여했다. 그가 모신 경제부총리만 해도 신병헌, 김만제, 정인용, 나웅배 씨 등 네 명이나 됐다.

 경제부총리가 바뀔 때마다 경제기획국장 교체여부가 관심이었다. 하지만 네 명의 부총리는 강 국장은 바꾸지 않았다.

 그는 199043일 두 번째 경제기획국장으로 발령났다. 노태우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금융실명제 도입이 철회되면서 한이헌 국장이 물러난 후였다. 두 번째 경제기획국장 재임기간은 한 달도 안 됐다. 그해 51일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승진했다. 관례를 벗어난 파격적 승진인사였다. 그는 차관보로 4년간 일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정권이 교체돼도 그는 차관보 자리를 지켰다. 이것도 기록이었다.

 그는 원칙과 소신에 충실했다. 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 1980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할 무렵, 각 부처에서 엘리트를 차출했다. 그는 차출 대상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상상 못할 일이었다.

 두 번째 사례. 차관보로 잘 나가던 그는 1993523일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밀려났다. 차관으로 승진해야 할 그로선 사실상 좌천이었다. 당시 실세였던 박재윤 청와대경제수석(통상산업부 장관, 부산대학교 총장 역임)과 정책충돌 때문이었다. 그는 박 수석과 호형호제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공적 소신은 사적 인연을 뛰어넘었다.

 김영삼 정부시절 박 경제수석이 강 차관보에게 신경제 5개년계획안수립을 주문했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있는데 무슨 신경제계획인가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작성지침을 만들어 청와대로 올라갔다. 국장급 비서관들이 보는 앞에서 박 수석과 강 차관보는 계획안을 놓고 격론을 벌었다. 그 핵심은 금융개혁이었다. 강 차관보는 금융개혁 없이는 신경제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 경제수석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고 맞섰다. 강 차관보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충돌했다.

 강봉균 장관의 증언.

 박 수석에게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라. 나는 못 하겠다고 소리치고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 동안 그 일을 안했어요.”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퇴근 무렵, 이경식 부총리(한국은행 총재 역임)가 강 차관보를 집무실로 불렀다.

 청와대와 상의했는데 강 차관보를 교체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발령이 났다. 청와대의 눈밖에 나면 그만둬야 했지만 그의 능력이 그를 지키게 한 것이다.

 하지만 관운(官運)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1993121일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실무대표단장으로 활동했다.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됐다.

 당시 쌀 개방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나 같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후보시절이던 19921123일 유세장에서 쌀은 절대 개방하면 안 됩니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은 개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공약한 상태였다.

 이 공약은 김영삼 정부의 족쇄가 됐다. 쌀시장 개방은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강 실장이 해결사로 총대를 멨다. 강 실장은 각계 전문가 20여명과 밤을 새워 토론하며 안을 만들었다. 강 실장은 11월 말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박재윤 경제수석 등이 배석한 가운데 쌀시장 개방 대책을 보고했다. 한국도 최소시장을 개방하고 개방기간을 최대한 유예하되 국민 수요의 1~4%를 수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 대통령은 강 실장 보고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강 실장은 제네바로 날아가 실질적인 UR협상을 지휘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강 실장은 그해 1228일 노동부 차관으로 승진했다. 이어 1994106일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됐다. 3개월여 만인 그해 1226일 다시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관 자리만 세 번째였다. 김 대통령은 그해 1223일 정부조직개편에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출범시켰다.

 그는 행정조정실장 시절 집을 반포에서 총리공관과 가까운 청운동으로 옮겼다. 그는 아이디어가 넘쳐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 맡은 일은 줄줄 꿰고 있어 빠꼼이로도 불렸다. 이수성 총리는 강 실장 같은 공무원이 있는 줄 몰랐다고 격찬했다.

 그는 학구열이 강해 미국 월리엄스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를, 그리고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심 없이 소신껏 업무를 합리적으로 추진한 결과는 장관 발탁이었다.

 강 장관은 정통부장관 시절 정보통신정책과 거시경제를 연결시켰다. 정통부가 정보통신산업 정책 결정할 때마다 거시경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해당 국장에게 질문했다. 경제 전체를 보라는 주문이었다.

 강 장관은 정책 입안 시 정기 또는 수시로 국장급 이상 회의를 소집해 토론을 하고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렸다. 강 장관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토론을 진행했지만 내용은 빈틈없이 챙기고 점검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 미루지 않았다. 현안은 즉시 결론을 내고 추진했다. 고위 관료 중 일부는 대통령이 싫어할 정책이나 장관이 책임을 져야 할 업무는 차일피일 미루거나 아예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그는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기획의 달인답게 결재서류나 보고서 등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쭉 읽어보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잡았다.

그는 정보통신에 대해 과외공부도 열심히 했다. 취임 후 818일 일요일에는 김창곤 기술심의관(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디지털케이블연구원 원장)으로부터 2시간여 통신망 구조와 CDMA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는 이후 분야별로 ETRI 등에서 전문가를 불러 특강을 들었다.

 강 장관은 취임사에서 강조한 정책 가운데 특히 벤처산업 육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강 장관의 회고.

 벤처산업은 정보통신 산업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경제를 주도할 미래산업이었습니다. 당시 초창기이긴 했지만 벤처 1세대들과 매월 만나 허심탄회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 장관은 매월 한번씩 저녁에 정통부 뒷 편 한식집에서 벤처 1세대 20여명과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정통부 관계자가 배석하지 않았다. 통상 장관이 관련업계 인사들과 만날 때는 실무자가 배석해 주요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강 장관은 그럴 경우 가식적인 대화가 오갈 수 있다면서 관계자 배석을 불허했다.

강 장관이 벤처기업인들과 정기 모임을 가진 것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각종 정책에 이를 반영하는 이른바 현장맞춤식 정책의 실천이었다.

 당시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은 김 회장을 비롯해 안경영 핸디소프트 사장, 서승모 씨앤에스테크놀러지 대표(벤처기업협회장 역임), 정영희 소프트맥스 사장(한국IT여성벤처기업인협회 부회장역임), 김혜정 삼경정보통신 사장, 임기호 내일정보기술사장(벤처기업협회 부회장 역임), 박병기 기산텔레콤 사장, 구관영 에이스테크놀러지 사장(현 에이스테크놀러지 회장), 김익래 다우기술사장(현 다우그룹 회장), 유영옥 서두로직 사장, 박병엽 팬택 사장(현 팬택 부회장) 등이었다.

같은 벤처 1세대인 이민화 매디슨사장(현 한국디지털병원 수출사업협동조합 이사장, KAIST 교수), 변대규 휴맥스대표(현 사장), 장흥순 터보테크 사장(벤처기업협회장 역임, 현 서강대미래기술연구원장), 조현정 비트 컴퓨터사장(벤처기업인협회장 역임, 현 비트컴퓨터회장) 이영남 이지디지털 사장(한국여성벤처협회장 역임) 등이 주축이 된 벤처기업협회는 통상산업부 산하였다. 처음에는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강 장관은 이들과도 만나 소주를 마시며 의견을 수렴했다.

강 장관은 매일 아침 6시반경이면 장관실로 출근했다. 부내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이 바로 강 장관이었다. 그는 업무시작 전 집무실에서 1시간 가량 단전호흡을 하면서 건강관리를 했다.

 강 장관은 탁상행정을 경계했다. 그래서 수시로 기업현장에 나가 현장의 문제점을 직접 확인하고 이를 개선했다. 그는 매월 기간통신사업자와 통신장비업체 등과도 정기 간담회를 열어 업계 의견을 수렴했다. 그는 현장 목소리를 중요시한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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