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3월에는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주도한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모임이었던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창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선학원에 깊은 관심을 가져 논 6,000여평을 헌납해 선학원이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만공은 1930년 3년여간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사에서 조실(祖室)로 있으면서 후학들은 지도한 후 1937년 마곡사 주지 소임을 맡았던 때를 빼고는 대부분 덕숭산 수덕사(사진)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능인선원(能仁禪院)과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見性庵)을 열어 선을 지도했다.
만공이 마곡사 주지로 있을 때인 1937년 3월 11일의 일이다.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일본총독인 미나미를 혼 낸 일은 유명하다. 미나미기 일본불교와 조선불교의 통합을 주장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호통을 쳐 일본 총독의 기를 꺾었다.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가 주재한 13도 도지사가 동석한 가운데 열리 31본사 주지회의에서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와 통합하려 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로 총독을 혼 냈다.
만공은 "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를 본받아 대처,식육,음주 등 파계하도록 한 것은 큰 죄다.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고 강력히 반대했다. 이는 당시 불교계에 큰 화제가 됐다.
1942년 여름에는 서산 간월도의 간월암을 복원하고 머물렀다. 이 때 남긴 게송이 있다.
깨끗한 반야 난초(淸淨般若蘭)
때때로 깨달음의 향기 토하네(時時吐般若)
사람도 이와 같으면(若人如是解)
비로자나 부처님이구려(頭頭毘盧師).
만공 스님은 76세인 1946년 10월 20일 목욕한 후 좌정해 열반에 들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혼자 말했다.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 년 동안 동고동락해왔지만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고생했네”
속세나이 76세. 법랍은 62세였다. 부도인 만공탑이 금선대 근처에 있다
속세를 떠나며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겼다.
나는 너를 여의지 않았고
너도 나를 여의지 않았도다
너와 내가 생기지 이전에는
미심쩍어라 이 무엇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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