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0월부터 한미통신회담이 재개됐다.
한미통신회담을 앞두고 정부는 전략을 변경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은 시공을 뛰어 넘어 유효했다. 미국 자문변호사를 통해 미국 대표단이 요구할 협상 목록과 미측의 협상 전략 등을 미리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협상전략을 세밀하게 세웠다. 개방할 것은 개방하되 개방이 불가능한 것은 최대한 지연작전을 쓰기로 했다.
한국측은 그간의 수세적 태도에서 공세적 자세로 전환했다. 나름의 냉정한 셈법에 따른 것이었다.
회담에서 핵심역할을 한 성극제 체신부 장관 자문관(현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의 말.
“미국 로펌을 통해 법률자문을 구하고 아울러 한국측 입장을 미국에 알리는 로비도 했습니다. 미국 변호사를 통해 회담을 유리하게 진행할 유익한 자료를 많이 구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훈령과 회담 안건, 미국측의 개방요구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했습니다. ”
미국측의 협상전략을 파악하고 나니 그만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체신부는 10월16일 오후 2시 회의실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한국측 수석대표인 박성득 통신정책국장 주재로 열린 회의에는 문영환 단장(체신부 기술심의관. 한국통신기술협회 사무총장 역임)과 성극제 자문관, 한국통신(현KT) 유완영 사업개발단장(오리온전기 사장역임) 등이 참석했다.
10월19일에는 통신망사업개방대책반장인 신윤식 체신부차관(데이콤사장. 하나로통신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이사장) 주재로 경제기획원과 외무부, 상공부, 과기처, 조달청 등이 참석해 정부 대응책을 논의했다.
한미 양측은 1989년 10월26일부터 27일까지 미 워싱턴에서 2차 통신회담을 열었다.
한국측에서는 박성득 수석대표를 비롯,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외무부, 조달청 등 6개부처 12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회담장소는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 무역대표부USTR) 4층 회의실이었다.
회담에서 한미양측의 입장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양측은 국가이익앞에서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다. 양측은 통신서비스와 공공구매, 표준화, 관세, 투자제한 등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렸다. 회담은 상호 입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막을 내렸다.
이 무렵, 신윤식 차관이 미 상공회의소 초청으로 10월25일 출국했다.
신 차관은 그해 11월1일 미 상공회의소에서 ‘한국통신의 현황과 발전방향’을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10월31일 오후 미 무역대표부를 방문, 201호에서 줄이어스 카츠부대표와 만나 한국측 통신개방 입장을 설명했다.
한미 양측은 연이어 매달 회담을 열었다.
3차 통신회담은 서울(12월18-19일), 4차 회담은 하와이(1990년 1월19-22일), 5차 통신회담은 워싱턴(1990년 2월14일-15일)에서 릴레이하듯 개최했다.
정부는 1990년 1월17일 하오 조순 부총리(한국은행총재 역임. 현 서울대 명예교수) 주재로 외무, 상공,체신, 과기처 등 통상대책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대미통상현안의 대책방향을 논의했다.
하와이에서 열린 제4차 한미통신회담도 양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의견접근을 보지 못했다. 미국측은 통신서비스분야의 경우 경쟁대상서비스의 범위 및 개방시기, 시장접근조건, 국제VAN(부가가치통신망)서비스, 경쟁보장장치등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해 한국측 입장에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측은 미국측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측은 우루과이라운드(UR)의 통신서비스개방문제에 관한 결정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점을 들어 다자간협상에서 논의할 것을 강력히 주장,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통신기기분야는 세부적인 기기표준제정절차, 외국시험성적서의 인정절차 등에 관한 논의를 했다. 공공구매분야는 세부조달절차, 적용대상기관, 시행 시기 등에 대해 우리측이 제시한 방안을 중심으로 협의했으나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한미양측은 긴 줄다리기 끝에 5차 회담에서 부분 타결점을 찾았다.
체신부는 회담에 앞서 미국의 통신분야 우선협상국지정에 따른 협상시한인 2월23일을 앞두고 기기표준 및 인증분야 등 각 분야에서 원칙적인 합의를 도출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5차 회담에서 한국측은 통신서비스 중 데이터베이스(DB)와 데이터처리(DP)분야는 1990년 7월부터 개방하겠다는 협상안을 미국측에 제시했다. 기기표준과 인증업무도 미측의 요구를 수용, 미국업체의 참여를 보장키로 했다. 공공구매는 한국통신(현 KT)으로 한정하고 통신장비는 1993년부터 공개구매절차에 따라 내.외국 구별없이 시장을 개방키로 했다.
한미양국은 2월15일 서비스와 표준화, 정부조달 등 합의한 내용을 양해록(ROU)으로 작성, 교환하고 회담을 끝냈다. 양측 수석대표가 각각 양해록에 서명했다.
행해록은 조약이나 협정과 같은 수준은 아니나 양국 당사간 비공식 합의를 문서화한 것이어서 협정문과 같은 구속력을 갖는다.
한미 양측이 통신시장 개방에 부분적으로 합의하자 미국측은 2월23일 한국에 보복조치를 취하지 않고 협상시한을 1년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칼라 힐스 미무역대표부(USTR)대표는 이날 “미국이 전기통신시장 개방을 위해 지난 1년간 한국 및 유럽공동체(EC)와 가져왔던 협상이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1년간 협상을 연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힐스 대표는 또 “한국은 미국에 통신시장을 개방하기 위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완전한 시장개방을 위해서는 해결해야할 일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은 미국과 통신시장 개방 협상에서 1년이란 시간을 벌어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미국측의 기본 입장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협상시간을 연장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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