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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36>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1. 9. 14.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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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6일.

환상의 열대 휴양지인 하와이 터틀베이호텔에서 한미통신회담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새벽 3시경. 여명(黎明)을 깨고 고성이 터져 나왔다.


“당신 소리지르지 마라.”


한국측 수석대표인 이인표 체신부 통신개방연구단장(정통부 통신정책지원국장. SKT고문 역임)이 격한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이런 식이면 회담하지 않겠다”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순간 회장담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 붙었다. 이 단장의 화난 모습에 미국측 낸시 애담스 수석대표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양측은 서둘러 정회를 선언했다.


“1시간 후에 다시 회의를 속개합시다.”

1년여 만에 2월4일부터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통신 회담장은 분위기가 살벌했다.


통상회담은 이익을 다투는 자리다.

회담에는 한국측에서 이인표 단장을 수석대표로 하고 체신부와 경제기획원, 외무부, 재무부, 상공부 관계자등으로 구성된 9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낸시 아담스 미 무역대표부 아.태 담당부대표보등 5명이 나왔다.


양측은 통신서비스시장의 개방범위와 시기등 서비스분야와 통신기기 및 정부조달분야 등 3개 분야를 논의했다. 하지만 접점을 찾지 못했다. 양측은 5일까지 열기로 했던 회담을 6일까지 하루 연장했다. 우선협상국 지정에 따른 협상시한인 2월23일을 앞두고 있어 회담장 분위기는 비장했다.


한미양측은 48시간 마라톤 회담에 들어갔다. 한잠도 자지 않고 협상테이불에 마주 앉았다. 국가이익을 지키겠다는 정신력 대결이었다. 양측의 가장 대립한 분야는 국제VAN(부가가치통신망) 개방시기였다. 미국은 조기개방을 요구했다.


회담 마지막 날 새벽,


미국 상무부 관계자가 한국측이 개방할 수 없다는 사안에 관해 반복적으로 캐 물었다. 그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한국측이 답변하면 또 물었다. 미측의 목소리 톤이 차츰 높아졌다. 이 단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급기야 이 단장이 고압적 태도를 보인 상무부 관계자를 향해 호통을 친 것이다.


1시간 후 속개된 한미통신회담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이 단장의 강경한 태도로 볼 때 정말 회담을 하지 않을수도 있다고 미국측은 판단했다. 미국측은 그간의 강경자세를 벗어나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자고 요구했다. 수석대표의 얼굴은 상황에 따라 다면적일 필요가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인표 단장의 회고.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상황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양측이 치열하게 대립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국가 이익이 달린 문제였잖아요. 여러 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회담에 참석했던 김창곤 체신부 정보통신과장(정통부차관 역임. 현LG유플러스 고문 )의 기억.


“그 당시 미국은 국제VAN(부가가치통신망)서비스 개방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그 업무가 제 소관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날 일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48시간 한잠도 못자고 회담을 하는데 이 단장의 배포와 협상력은 대단했습니다. 이 단장은 회담전략을 시의적절하게 구사해 한국측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었습니다.”


이 회담에서 한미양측은 통신서비스와 통신기기 및 정부조달분야에 관한 주요 논의내용을 정리한 ‘91 양해록’을 작성했다. 양허록에서 양측은 통신장비 인증기준을 비롯한 강제표준 제정 절차와 이와 관련한 불만처리 및 이의제기 등은 투명하고 공개적인 절차를 보장한다는데 합의했다. 외국기업의 한국시장 참여도 보장키로 했다.

그러나 양측이 이견을 보였던 국제VAN 전면개방시기 문제는 그해 5월 협상때 재론(再論하기로 합의했다.


한미양측이 양해록을 교환하자 미 무역대표부는 2월22일 한미통신협상 기간을 다시 1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다시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체신부는 이에 앞서 1990년 4월11일 국장급 인사를 단행했다.
체신부는 전파관리국장에 박성득 통신정책국장(정통부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을, 통신정책국장에 이인학 중앙전파감시소장(현 중앙전파관리소. 우정국장. 데이콤감사 역임)을 임명했다. 그해 7월 4일 통신개방연구단장에 이인표 총무과장을 승진발령하고 문영환 단장은 전파심의관으로 전보했다.


이로 인해 한미통신회담 한국측 수석대표도 교체된 것이다.


전례를 따른다면 이인학 통신정책국장이 수석대표를 맡아야 했다. 하지만 이인표 개방단장이 수석대표를 맡았다. 대책마련과 회담을 한 사람이 맡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90년 1월 해외근무를 마친 구영보 서기관(우정사업본부장. 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장 역임. 현 SKT고문)이 개방단에서 파견근무를 했다.

그는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협상(UR/GNS)에 대비, 통신분야 주요 쟁점을 검토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구영보 서기관의 증언.

“UR에 대비해 스위스 제네바에 매달 한 번 꼴로 출장을 갔습니다. 토요일에 출발해 현지에서 협상 관련자료를 얻어 내용을 정리해 곧바로 팩시밀리로 서울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일요일 밤 비행기로 돌아왔습니다. 강행군이었죠. 1990년 10월에 열린 전문가회의에는 제가 대표로 참가했습니다.”


체신부는 1990년 7월13일 통신시장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1차 구조조정이었다. 이 정책의 기본방침은 ‘선(先) 국내 경쟁, 후(後) 개방’이었다.


조정안의 핵심은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독점해온 전화사업중 국제전화는 9월부터 데이콤(현 LG유플러스))의 참여를 허용하고 시외전화는 1992년 하반기 이후 국제전화경쟁도입성과를 고려,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기간통신사업자로부터 회선을 빌려 다양한 정보축적.처리.전송서비스를 제공하는 부가통신사업은 8월부터 다수경쟁체제에 들어가고 차량.휴대전화, 무선호출등 이동통신사업도 92년 하반기 이후 복수경쟁체제로 전환하기로 했다.


체신부는 통신사업구조조정을 2단계로 구분, 1단계는 1990년부터 국제전화를 경쟁시키고 2단계로 1992년 상반기까지 이동통신사업등도 경쟁체제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 데이콤측은 "전화교환시설확보등 준비기간을 거쳐 국제통신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과 일본, 홍콩 등 3개국을 중심으로 오는 1991년7월부터 국제전화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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