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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하는 데이콤 - 설립막후

문화. 관광.게임

by 문성 2009. 11. 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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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데이콤 설립 과정


 세상만사가 항상 의도대로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고개를 넘어야 한다.
 데이콤 설립도 마찬가지였다.
  데이터통신이란 컴퓨터와 통신선을 연결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사업이다 . 하지만 그 때는 데이터통신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드물었다. 또 이 사업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수익을 낼지도 잘 몰랐다.
상황이 이러니 당연히 통신관련 기업들의 관심은 낮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럴법도 했다. 돈이 될지 아닐지를 판단 못하는데 무작정 투자를 하겠다고 나설 기업이 있을리 없다. 그 시절은 인터넷이나 PC통신이 등장하기 이전이나 이 개념을 이해하는 일반인은 없었고 기업 CEO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시 정책 입안자들은 장래 이 분아갸 유망분야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데이콤 설립이 지지부진하자 체신부가 총대를 멨다. 우선 통신관련 기업과 언론사 대표들을 체신부 회의실로 불러모아 투자 설명회를 가졌다. 예상대로 기업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데이터통신의 이용율이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화사업에 비해 시장규모가 작아 이익을 내기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오명 차관이 직접 나서서 기업들의 투자를 설득했다. 오 차관은 참여 기업들을 설득하면서 “5년 내에 흑자로 전환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업들이 오 차관의 발언의 이면을 못 알아들을리 없었다. 바뀌 말하면 5년간 정부가 데이콤의 지원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미의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기업들이 데이콤 투자에 차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 차관의 이런 노력에 힙입어 당시 26개 기업들이 출자를 하겠다고 나섰다. 출자회사의 자격은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원사와 TV방송국. 통신사. 한국전기통신공사 등으로 제한했다. 총 출자액은 59억8천만원으로 정했다.

  당시 최대 주주는 20억원을 출자한  KT였다. 삼성과 LG(당시 럭키금성), KBS, 대영전자 등이 3-7억원 씩을 냈다.  또 연합통신. 한국전자통신. 중앙전기. 한국상역, 대한전선, 광림전자. 국제전자. 오리콤. 제일정밀 등도 투자에 참여했다.  민간회사의 출자한도액은 그룹의 경우 1개 그룹당 7억원 이하, 일반회사는 5억원 이하로 원칙을 정했다.

데이콤은 이런 과정을 거쳐 82년 1월 27일 체신부 회의실에서 데이터통신 전담회사인 데이콤을 설립하기 위한 발기인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우재 한국통신 사장을 발기인 회장으로 선임했다. 이 사장은 육사 13기로 육군통신 차감을 역임한 육군 준장 출신이다.  국보위 상임위원를 거쳐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하나회 후배로 그가 KT사장직을 고사했을 때 전 대통령이 직접 그를 불러 “그 자리는 당신이 맡아”라고 말할 정도로 신임이 돈독했다고 한다. 그는 KT사장을 지낸 후  89년  체신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데이콤은 82년 3월 10일 26개 주주와 발기인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사장에 이용태 씨를 선임했다. 그리고  12명의 비상근 임원과 감사를 뽑았다.  체신부 통신정책국장 이해욱. 총무처 행정관리국장 정문화, 과학기술처 신만교 정보계획국장, 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 최순달, 연합통신 사장 김성진, 한국전자통신 사장 강진구 등이 주요 임원 등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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