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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하는 데이콤-초대 사장 선임 비화

문화. 관광.게임

by 문성 2009. 11. 2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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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콤의 초대 사장은 누가 될까.

데이콤 창립을 앞두고 단연 관심은 사장 선임이었다. 회사의 얼굴을 정하는 일이니 쉬울리 없었다. 자천타천의 인물이 등장했지만 선택의 키는 체신부가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강력한 사장 후보로 거론됐다. 정보화 1세대인 이용태와 성기수였다.  두 사람은 한국 컴퓨터업계의 거두였다. 두 사람은 KIST 전산실 출신이고 미국 유학파였다. 이용태는 유타대학, 성기수는 하바드대학에서 각각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용태(사진.좌)는 지난 57년 서울대물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부터 학원 강사를 하면서 가족의 생활까지 책임을 졌다.  당시 서울에서 유명한 EMI학원에서 가명으로 수학을 강의해 명성을 얻었다. 지난 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타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아 지난 70년 KIST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후 전자계산기국산화연구실장을 거쳐  78년 신설된 전자기술연구소 전산개발담당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연구소에 근무하면서도 친척과 같이 대일학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는 컴퓨터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뒷날 그는 큐닉스와 엘렉스 등 벤처기업을 창업했고 삼보컴퓨터를 설립했다. 그는 벤처 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설립한 삼보컴퓨터는 자본금 1천만원으로 시작했으나 한 때 연매출이 2조원을 기록했다. 


 성기수(사진. 우)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다.

지난 58년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후 공군사관학교 교관을 하다  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 대학에서 2년만에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였다.

 그는  63년 귀국해 공사 교관과 서울대 대학원 강사를 일했다.  67년 KIST 전자계산실장으로 들어가 시스템연구담당 부소장을 거쳐 시스템공학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경제기획원 정부예산업무와 제신부의 전화요금업무 등 각종 정부 업무 전산화와 민간기업 업무의 전산화까지 도맡아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엄청난 실적을 남겼다.

 
  두 사람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이용태는 사업가적인 기질이 농후했다. 그는 진취적이고 이상적이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다녔다.

성기수는 치밀하고 논리적이었다. 공사가 분명했다.  목적달성을 위해 타협할 줄 몰랐다.

두 사람은 정보화를 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많았다. 사람의 대립했던 일은 행정전산망 사업이었다. 주전산기로 사용할 국산중형컴퓨터 개발에 관한 일이다.

이용태는 국산 주전산기 개발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성기수는 해외 검증된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성능과 안정성이 검증된 제품은 당시 외산뿐이었다.

정부는 격론 끝에 국산 주전산기를 개발하기로 방향을 결정했다.  성 박사는 이런 정부의 방침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의견을 받영한다는 조건을 달아 ‘조건부 서명’을 했다. 두 사람은 이처럼 뚜렷한 개성과 소신을 가지고 국내 정보화에 각각 족적을 남겼다.

이 두사람은 놓고 고민하던 중 체신부는 이용태를 사장으로 최종 결정했다.  성기수는 나중에 동명정보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오명 체신부 차관이 선택의 키로 쥐고 있었다.  오 차관은 이용태 결정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두 사람이 모두 장단점이 있지요. 하지만 데이콤이 민간기업인만큼 사업 수완이 있는 사람에게 사장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을 빼고는 사장 후보를 생각할 수 없었어요”

체신부로서는 신생 기업의 이윤을 생각안할 수 없었다. 더욱이 오 차관은 데이콤 투자에 냉담했던 기업들을 유치를 하면서 "5년내 흑자를 내도록 하겠다"고 말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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