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이면 대선을 불과 4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민자당 김영삼 대표조차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불복을 선언했다.
김대표는 이날 오후 강릉지구당개편대회에서 “ 제2이동통신사업이 위기국면의 촉매작용을 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복종해 사업자 선정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은 22일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김 대표의 발언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현직 대통령과 여당 대표간에 정면 충돌의 파국위기였다.
이런 사태는 예고된 일이었다. 김 대표는 노대통령에게 모두 4번이나 노대통령 임기중에 이동통신을 선경에 넘기는 경정을 하면 그 과정이 아무리 공정해도 특혜시비에 휘말릴 것이라고 사업자 선정 연기를 주장했다. 송언종 체신부장관(사진)도 이런 우려를 청와대에 전했으나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김대표의 대선캠프에 몸담았던 H씨의 전언.
“YS는 국민 여론을 중시하는 스타일입니다. 여론이 나쁘면 그는 어떤 일이건 바로 궤도를 수정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특혜의혹에 휘말리면 정권재창출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노 대통령과 YS는 주례회동을 했어요. 아무리 공정하게 심사해도 대통령의 사돈기업에 이동통신사업권을 넘기면 의혹만 커질 수 있다며 연기를 주장했어요.”
노대통령은 이에 대해 “대통령 사돈이라고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되며 공정한 심사와 평가를 하면 문제가 될 게 없다”며 이동통신사업의 임기내 선정을 강행했다.
김 대표는 최종현 회장과 절친한 사이인 이승윤 의원(경제부총리 역임)을 내세워 최 회장에게 사업권 반납을 설득했다고 한다. 24일 김대표는 하이얏트 호텔에서 최 회장과 직접 만나 담판을 지었다는 것이다. 김대표는 언론에 “선경이 빠른 시일안에 사업권을 자진 반납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선경그룹의 사업권 자진반납은 언론들이 ”선경 반납방침 확정“을 대서특필한 지 사흘 만인 27일 오후에서야 이뤄졌다. 청와대와 여당, 정부는 대한텔레콤의 자진 반납이라는 해법을 찾기 위해 막후에서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체신부와 선경은 줄다리기를 했다. 송언종 장관은 박성득 정책실장에게 대한텔레콤의 사업권을 반납받으라고 지시했다.
박 실장의 회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선경은 체신부가 반납하라고 하면 반납하겠다고 했어요. 그것은 체신부의 선정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선경도 자진반납을 하면 자신들이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음 사업권 신청에 참여할 수 없었어요. 주주들과 손해배상 문제도 걸려 있었지요.“
박영일 정책심의관의 회고.
“담당국장이니 제가 손길승 사장을 불렀습니다. 손 사장과는 대학동기입니다. 자진반납을 설득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는 8월 27일 해법의 총대를 맸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이진설 수석( 건설부장관. 서울산업대 총장 역임. 현 센트럴씨티 회장)과 박운서 비서관(상공부 차관. 파워콤 회장 역임)라인이었다. 청와대는 비서실장 명의로 선경에 사업권 자진반납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정치적 해법을 선택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근무하던 서영길 행정관( 정통부 우정국장. TU미디어사장 역임. 현 세계경영연구원 창조경영연구소장)의 말.
“ 사업권을 놓고 정치권의 공방이 치열했어요. 그 무렵 공문을 기안하라는 지시를 받고 애매하게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그후 윗분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릅니다. 그 일은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
그가 기안한 공문은 청와대 정해창 비서실장(현 좋은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명의로 최종현 선경그룹과 손길승 대한텔레콤사장( SK그룹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역임. 현 sk그룹명예회장), 김항덕 유공 사장(SK그룹 고문역임) 앞으로 보냈다.
‘이동전화 사업에 관한 권고’라는는 제목으로 8월27일로 보낸 공문(대비경 344-1104)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 그간 국가정보산업 발전을 위해 힘써 오신 귀사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2. 최근 정부는 국내의 이동전화 이용 편의를 중진하고 산업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법한 절차와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귀사를 제2이동통신사업의 신규허가 법인대상으로 확정, 통보하였으나 귀사의 대주주인 유공이 대통령과의 특수관계임을 이유로 일부 정치권과 언론등이 크개 이의를 제기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정치사회적 불안을 초래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3. 그러나 국론을 조속히 통일하고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에 함께 매진하가 위하여 대한텔레콤의 대주주인 유공이 자기 책임하에 구성주주를 설득, 사업권을 자진포기하여 현재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는데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공문을 접수한 대한텔레콤의 손길승 사장은 27일 오후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자진반납을 발표했다. 이전에 체신부에 반납서류를 제출한 후 였다.
체신부는 28일 사업자 선정은 차기 정부로 넘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송 장관은 이날 사업권반납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으나 반려됐다. 사업자 선정발표에서 자진반납까지 7일간 정국을 특혜의혹설로 들끊게 했던 대치정국은 그렇게 해소됐다.
그러나 청와대의 무리한 밀어붙이기식 사업권 선정은 정부에 대한 불신감과 정책 일관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선경그룹은 분루(憤淚)를 삼겼지만 문민정부들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오늘의 SK텔레콤을 소유햇다. 세월의 장난이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은 신(神)만이 아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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