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년 5월23일.
체신부는 이동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 심의를 거쳐 ETRI주관으로 선정한 업체 38개사를 최종 확정, 발표했다.
확정한 개발과제는 △RF칩(고주파칩), 신호처리용 ASIC(주문형반도체)등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핵심부품 8종 △RF필터(고주파여파기), 주파수합성기등 휴대전화기핵심부품 14종 △무선호출수신기등 기타 이동통신기기류 4종등 총 26개과제였다.
개발기간은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핵심부품은 92년부터 94년까지 3년간, 휴대전화기 핵심부품과 기타 이동통신기기류는 96년까지 5년간으로 했다.
ETRI 이영규 본부장(TTA전문위원 역임)의 회고.
“심사장에서 신청업체 대표가 제안서 내용을 10분간씩 발표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기업이 팬택(현 팬택계열)이었습니다. 팬택은 91년에 창업한 벤처기업으로 박병엽 사장(현 팬택 부회장)이 당시 갓 서른살이었습니다. 자신만만하고 딱부러지게 사업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심사에 참여했던 이혁재 부장의 기억.
“팬택은 개발업체로 선정돼 2년 정도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지원액이 1억원 정도였습니다. 사업이 매년 급성장하자 자금을 지원받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자금을 더 지원받아도 되는데도 거절했습니다. 당시 선정한 업체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잠시 팬택의 화려했던 과거를 살펴보자.
팬택은 1991년 박병엽 사장이 창업했다. 직원은 6명, 자본금은 4000만원이었다. 영업사원이었지만 맥슨전자에서 임원급 대접을 받았던 그는 29살에 창업했다. 무선호출기를 만들었다. 이듬해 무선수신기호출 분야에 제안서를 냈다. 1억원의 자금지원을 받은 팬택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해마다 엄청난 상승세를 기록했다.
97년 매출이 762억원이었다. 휴대전화기 생산에 뛰어들어 2001년 현대큐리텔을 인수했다. 2003년 매출 2조원, 2005년 매출 5조원을 달성했다. 승승장구하던 팬택에 위기가 닥쳤다. 유동성 위기에 빠져 2006년 11월 25일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그리고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 후 올들어 지난5일 미국에서 스마트폰 ‘크로스 오버’를 출시했다.
이듬해인 1993년 3월.
안병성 단장은 한기철 부장(현 ETRI 책임연구원)과 이성경 부장 등 연구진과 미국방문길에 올랐다. 미국 달라스에서 열리는 CTI쇼를 참관하고 이어 샌디에이고로 가서 퀄컴사를 방문했다. 안 단장은 CDMA방식의 이동통신개발의 한국측 실무책임자였으나 퀄컴방문은 처음이었다.
한 부장의 회고.
“안 단장은 취임 후 쿼컴사에 곧장 가지 못했습니다. 국내에서 지정 개발업체 선정 등 할 일이 많았습니다. 퀄컴사가 한국측 공동개발 파트너인데 실무책임자가 직접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건의해 일정을 잡았습니다. 퀄컴에는 연구원들이 파견돼 2단계 공동기술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
안 단장은 퀄컴에서 제이콥스 회장과 만나 양측의 효율적인 2단계 공동개발 등에 관해 논의했다. ETRI와 퀄컴은 원할한 공동 연구를 위해 2개월에 한 번식 상호 교환방문을 하기로 합의했다. 5월에는 퀄컴 연구진들이 한국으로 왔다. 그해 4월부터 교환기와 단말기 업체들은 업체당 34명의 개발인력을 ETRI와 퀄컴사에 파견해 6개월간 공동 설계 작업에 참여했다.
안 단장은 기술이전과 시스템 구조 등을 놓고 퀄컴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퀄컴측이 한국에 이전해 주는 원천기술 지연과 시스템 구조변경 등으로 상용화 일정이 늦어졌다. 그는 퀄컴측과 이미 계약한 내용도 따지고 들어 퀄컴을 곤혹스럽게 했다. 특히 전송교환방식을 놓고 퀄컴측과 시각차이가 컸다.
이런 가운데 그해 8월. 국내 지정 업체들은 퀄컴과 로열티 협상을 마무리 했다.
퀄컴과 기술이전과 관련한 협약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퀄컴과 ETRI간 공동기술개발협약이었다. 다른 하나는 퀄컴과 국내 지정 개발업체간 기술사용협약이었다.
국내 제조업체들은 CDMA기술이 적용되는 부분에 대해 일정 비율의 로열티를 국내 13년, 국외 15년간 지급하기로 했다. 국내 판매용 단말기의 경우 매출액의 5.25%, 수출은 5.75%로 했다. 기지국의 무선장비는 국내 6.0%, 수출은 6.5%를 내기로 했다. 다만 퀄컴이 국산 기지국 장비를 구매할 경우 5%의 로열티를 내기로 했다. 이런 로열티는 AT&T나 모토로라 등과 맺은 5%보다 최고 1.5%나 많은 액수였다.
한기철 부장의 말.
“ETRI와 퀄컴이 맺은 로열티는 5%였습니다. 이는 국내기업들에게 가이드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업체별로 기술수준이 다르고 별도의 협상 카드에 따라 로열티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낮게 로열티를 결정한 기업의 경우 관련 특허기술을 상호 이용하는 교차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했을 것입니다. 당사자간 협상이고 대외비 사항이어서 전혀 내용을 알 수 없었어요.“
한국 업체들은 처음 공동 협상을 진행했으나 현대전자가 이를 깨고 퀄컴측과 가장 먼저 로열티 계약을 체결했다.
이혁재 부장의 증언.
“ 현대가 공동전선을 깨고 먼저 계약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어요. 현대는 다른 업체에 비해 교환기 기술이 부족했습니다. 초조했죠. 현대로서는 빨리 기술을 이전받아 다른 업체와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싶었을 겁니다. 별도 기술을 이전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
남의 원천기술을 이전받아 세계 첫 CDMA상용화를 추진하는 과정은 칡과 등나무처럼 자기 이익 극대화를 위한 대립과 타협이 서로 얽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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