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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18>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1. 7. 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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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신부는 1993년 6월15일 청와대 등과 협의를 거쳐 제2이동통신의 서비스방식을 CDMA방식으로 결정했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어 " 제2이동통신방식을 CDMA방식으로 결정했다”면서“ "국내외의 급격한 기술발전추세와 해외시장전망 등 그동안 여건이 현저히 바뀐데다 국내개발중인 디지털시스템의 조기상용화가 가능해져 CDMA로 최종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발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정책결정이었다.

먼저 사업자 선정과 기술방식을 연계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정책의 불확실성을 제거했고 이로서 CDMA방식이 제2이동통신방식이라는 점을 대내외에 확인시켰다. 그동안 CDMA방식의 이동통신개발에 소극적이었거나 TDMA개발을 주장했던 기업들이 화달짝 놀라 CDMA개발에 총력질주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의 말.

“그 당시 TDMA방식을 개발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기술종속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선진국 뒤만 따라갔을 겁니다. 수입제품이 국내 시장에서 판쳤을 겁니다. 우리가 CDMA 첫 상용화에 성공한 결과 휴대폰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윤 장관은 그해 7월 16일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방문, “CDMA개발은 전쟁이다”라는 글귀를 써 붙이라고 지시했다.


CDMA와 TDMA를 놓고는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그해 가을, 국회교체위에서 의원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윤 장관이 유례를 찾기 힘들 조치인 삼성전자의 체신부출입을 금지시킨 것도 이무렵이었다. 당시 140억원을 들여 아날로그개발에 착수한 삼성측은 국회의원들을 부추켜 체신부를 몰아부쳤다는 의혹을 샀던 것이다.


출입금지 조치 후 보름만에 삼성전자 강진구 사장과 김광호 이사 등이 윤 장관을 방문해 사과하고 정부 정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일단락됐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공자원부는 그해 9월 16일 디지털 이동통신 단말기 공동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실용화되기 시작하고 있는 TDMA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단말기를 수출상품화하기로 하고 전자부품종합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단말기업체와 부품업체가 같이 참여해 단말기와 핵심부품을 공동 개발키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단말기와 디지털 핵심부품개발에 필요한 연구개발비 3백30억원중 공통 핵심기술과 디지털 부품개발에 소요되는 개발비 1백30억원을 공업기반기술개발 사업비 등에서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개발할 단말기는 유럽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유럽형 규격(GSM)과 북미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북미형규격(ADC)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겸용 단말기로 유럽방식은 93년부터, 미국방식은 94년부터 개발에 착수해 각각 2년이내에 시제품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이런 계획에 따라 그해 12월부터 TDMA방식의 단말기 개발사업이 추진됐다. 이 사업에는 전자부품종합기술연구소와 삼성전자. 금성통신,대우통신,동앙젼자통신이 참여해 미국과 영국에서 기술도입을 했다. 당시 기술도입료로 300만달러를 지불했다.


상공부 전자정보산업국장은 이희범국장(산업자원부장관 역임. 현 STX그룹에너지부문 총괄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장 )이었다.

이 사업의 기술개발체계는 체신부가 추진하는 CDMA개발추진방식을 그대로 준용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국내 기술표준이 CDMA방식이어서 국내 시장이 형성되지 못했다. 또한 원천기술업체에 주는 로열티가 10%에 달했다. 퀄컴의 5%보다 배나 많은 금액이었다. 결국 수출시장에서 경쟁력있는 제품이 되지 못했고 국산 대체효과도 크지 않았다.


부처간 업무 영역을 둘러싼 갈등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마치 지진이(地震)이 몰려오듯 관가(官街)를 뒤흔들었다.

이런 갈등의 고비를 넘기고 CDMA방식의 이동통신개발은 성공고지를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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