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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276>정통부 장관은 자민련 몫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3. 8. 7.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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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는 1998년 3월 6일 첫 조각을 앞두고 오전부터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 대통령은 오전 9시 본관 2층 백합실에서 김종필 총리서리와 박태준 자민련 총재(작고. 국무총리 역임)와 3자 회동을 갖고 조각을 마무리했다.

 

이어 오전 11시 박지원 대변인을 통해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오후 2시 본관 세종실에서 김총리 서리와 신임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여러분의 두 어께에 국가 운명이 달려 있다”며 위기극복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임명장 수여식에는 대우전자 프랑스 사장으로 근무 중인 배순훈 정통부 장관을 제외한 16개 부처 장관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다.

 

배 장관은 자민련 추천 몫이었다. DJP연합에 따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동 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자민련 몫으로는 이규성 재경부장관과 강창희 과학기술부 장관(현 국회의장), 최재욱 환경부 장관,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 이정무 건설교통부 장관, 김선길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밝힌 내용.

“3월 3일 김종필 총리서리 체제를 출범시켰다. 퇴임을 앞둔 고건 총리의 제청으로 17개 부처의 조각을 마무리 지었다. 고 총리가 진정 고마웠다. IMF 외환위기를 맞아 작지만 효율적인 정부를 만든다는 목표아래 경제 및 통일 부총리 제를 폐지하고 23개 정부 부처를 17개로 줄였다”

 

장관 인사(人事)와 관련해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용인술(用人術)은 대조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철통보안을 강조해 사전에 인사내용이 언론에 오르내리거나 외부에 알려지면 어김없이 그 인사는 전면 백지화했다. 반면 김대중 대통령은 사전에 측근들과 충분히 자격 여부를 검토해 확정했다.

 

김중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현 변호사)의 말.

“대통령에게 인사 대상자를 추천할 때 숫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 3배수나 5배수를 올렸고 우선순위는 매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고란에 그 사람의 특징과 장단점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대통령이 그 기록을 꼼꼼히 살펴본 후 참모들과 토론을 합니다. 대통령이 관저로 그 자료를 가져가서 몇 번 보고 참모들과도 수차례 논의를 거쳐 최종 확정하셨습니다”

 

김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는 배 장관 대신 박성득 차관(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KMI이사회 의장)이 참석했다. 김영삼 정부가 임명한 유일한 차관 참석자였다.

 

개각과 관련한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대통령 정무수석, 민주당 부총재 역임)의 일화 하나.

15대 대통령 인수위 정무분과위 간사였던 김 장관은 개각 당일 아침 입각이 결정됐다는 귀띔을 받았다. 잠시 후 해양수산부 간부가 전화를 해 “저희부 장관으로 오시게 된 것을 축하드린다”며 업무보고를 하러 오겠다고 했다. 예상외의 전화에 깜짝 놀란 김 장관은 “정식 발표도 없고 통보도 없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방문을 거절했다.

 

잠시 후 청와대로부터 정식 입각을 통보받았다. 해양수산부가 아닌 초대 행정자치부장관으로 확정됐다는 전화였다.

 

10여분 뒤 서울 여의도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로 행정자치부 간부들이 달려왔다.

그 짧은 시간에 장관 취임사와 명함까지 준비해 왔다. 그리고 ‘급한 결재 서류가 있으니 바로 결재해 달라’며 서류를 내밀었다.

 

김 장관은 “입각 통보만 받았을 뿐 임명장도 안 받았는데 무슨 결재냐”며 그들의 요구를 물리쳤다. 임명장도 받지 않았는데 결재서류가 먼저 찾아온 셈이었다.

 

김 전 장관의 회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왔는가를 나중에 알아보니 행자부 간부들은 장관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모 인사 사무실로 달려가다가 내가 장관으로 발탁되자 즉시 발길을 돌려 내 개인 사무실로 왔다고 합니다. 그들의 처세술과 순발력은 정말 놀랄 일이었습니다”

 

배순훈 정통부 장관의 발탁은 당시로선 깜짝 인사에 속했다.

대우전자 프랑스 사장으로 일하던 그에게 입각의사를 타진하기 위한 국제전화가 걸려온 것은 2월 중순경.

 

전화를 건 사람은 그해 2월 10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내정된 강봉균 정통부 장관((재경부 장관, 16.17.18대 국회의원 역임, 현 건전재정포럼 대표)이었다.

 

두 사람은 안면은 있었지만 교류는 별로 없었다. 강 장관은 본론을 꺼냈다.

“차기 정부에서 장관으로 일해 볼 용의가 있습니까”

예상외의 질문이었다. 그는 정치와 무관하게 지낸 전문경영인이었다.“어느 부처 장관을 말씀하십니까”“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부나 상공부가 되지 않겠습니까”

배 장관은 자신의 전공이 기계공학이어서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김우중 회장과 입각 문제를 상의했다.

그 무렵, 김 대통령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밀월관계였다. 김 대통령의 김 회장에 대한 신임은 두터웠다.

 

김 회장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새 정부에서 각료로 일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며칠 후 강 장관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생각을 정리하셨습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부처는 과학기술부나 정통부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리고 3월2일 첫 내각 발표 직전 정통부 장관 임명을 통보받았다.

 

이와 관련한 강봉균 전 장관의 회고.

“정통부 장관 발탁과 관련해 김 대통령의 지시로 후임자를 추천했습니다.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밝힐 수 있지만 처음 정통부 장관으로 추천한 사람은 배 장관이 아니었습니다. D그룹 C사장이었습니다. 그 분이 ‘자신은 정보통신분야를 잘 모른다’며 장관직 제안을 극구 고사했습니다. 청와대로부터 입각 제안을 받으면 무조건 ‘최선을 다 하겠다’고 하는데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더군요. 훌륭한 분이었어요”

 

3월3일 배 장관은 가족을 파리에 두고 혼자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전문경영인에서 행정 관료라는 새로운 삶이 배 장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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