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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주의 '배순훈 장관'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3. 8. 1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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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

 

 

그는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세계에서 난다 긴다하는 수재들이 모인 MIT에서 장학금을 받아 석사과정을 끝낸 뒤 6개월 만에 박사 과정을 마쳤다. 그의 학위 논문은 그 분야의 핸드북에 실렸다.

 

배 박사가 MIT박사학위를 받자 미 이민국에서 곧바로 영주권을 내주었다.

미국 보그워너사 주임 기사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배 박사는 1972년 완공한 미국무역센터의 에어컨시스템을 설계했다. 무역센터는 높이가 416m로 당시 세계 최고층 건물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미국 TMI원자력 발전소 저온 냉동기도 설치했다. 이어 당시 극비에 속했던 원자력 잠수함 냉동기도 설계했다. 이 작업을 위해 미 국방성은 배 박사에게 비밀취급인가를 내주었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그는 1972년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정근모 박사(과학기술처 장관 , 명지대총장 역임. 현 한국전력 고문)가 KAIST 부원장으로 부임하면서 기계과 조교수로 일하자고 설득했던 것이다.

 

배 장관의 증언.

“그 과정을 이야기 하자면 사연이 길어요. 처음엔 미 국제개발처(AID)에서 연구비를 받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자동차 엔진을 만들어 보자며 정근모 박사와 이경서 박사(단암전자통신 회장 역임), 제가 의기투합했어요. 정 박사는 AID 책임자인 존 한나 박사와 친했어요. 그런데 AID에서 무상원조를 지양하고 한국에 MIT같은 교육기관을 설립키로 방침을 변경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이를 적극 지원키로 해 정 박사가 KAIST설립을 주도했고 나중에 부원장으로 부임했어요”

 

그해 말. 박정희 대통령이 KAIST를 초도 순시했다. 박 대통령을 안내하던 과학기술처 국장이 배 박사를 대통령에게 “MIT 박사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갑자기 물었다.

“연탄 온돌방에서 자다가 가스중복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데 해결방법이 없습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배 박사가 머뭇거리자 박 대통령이 다시 말했다.

“좋은 대학 나왔으면 그런 연구를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 놓고 잘 수 있게 해야지”

그 후 배 박사는 거액의 연구비를 받아 서울 홍릉 과학원 안에 집을 한 채 지어 놓고 온돌연구에 착수했다.

 

1973년 배 박사는 연구보고서를 제출했다. 무색무취의 치명적인 가스가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박 대통령은 “박사가 왜 안된다고 하느냐.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말고 되는 해결방안을 찾아 보라”고 지시했다.

 

배 전 장관는 “박 대통령의 지시는 분석에 능한 미국식 공학박사인 나에게 현실적인 유럽식 공학적 접근방법을 일러 주었다”고 회고했다.

배 박사는 대안으로 온수 온돌을 제안했다. 아궁이를 밖에 설치하면 연탄가스는 해결하는데 문제는 돈이 더 든다는 점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경기도 용인에 온수 온돌단지를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게 오늘날 온수온돌의 시작이었다.

 

그는 1976년 한국기계 부곡철도차량 공장에서 김우중 대우회장을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은 완벽주의자인 동시에 모험가였다. 그는 기존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 기업인이었다.

 

그는 1976년 대우중공업 기술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회고.

“당시 선배인 조순탁 박사(작고. 서울대 교수,KAIST원자 역임)에게 상의를 했더니 ‘현장에서 뛰는 것도 좋다. 가서 마음에 안들면 다시 KAIST로 돌아와라. 받아 주겠다’고 해서 이직을 했어요”

그는 대우로 가자 울산발전소를 턴키방식으로 수주해 1978년 완공했다. 국내 발전소 사상 최단기 완공기록을 세웠다.

이후 그는 대우엔니어링 부사장, 대우기조실 전무, 대우자동차 부품 사장, 대우 국민차 사장으로 일했다. 대우 재직중 1982년부터 2년간 미국 스탠포드대학과 MIT에서 각 1년 씩 공학설계와 시스템설계를 강의했다.

 

그는 대우자동차 부품 사장시절 수입하던 티코 브레이코를 자체 개발했고 1988년 자동차용 발전기를 개발, 1989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상을 받았다.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대우전자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면서 1993년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탱크 주의’를 주창(主唱)했다. 그는 현장 사원들에게 “우리가 만든 제품을 미국과 독일, 프랑스 사람들이 사게 하려면 품질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배 사장은 매일 아침 작업을 하기전 시(詩)를 낭송하며 15분씩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현장 개혁을 추진한지 3개월이 지나자 대우 제품은 소니보다 생산성이 높았고 품질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됐다. 이런 노력으로 대우전자는 1000만대의 포터블 라디오를 수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세계 시장점유율 10%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배 사장은 탱크주의 TV광고에 인기 탤런트 유인촌씨(문화관광부 장관 역임. 현 예술의 전당 이사장)와 같이 출연했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이 광고로 배 사장은‘탱크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광고에서 배 사장은 공장을 방문한 유인촌에게 “여기가 바로 탱크주의 심장부”라고 소개한다. 이어 둥근 쇠망치로 브라운관을 치는 실험을 본 유인촌이 “어, 안깨지나요”라고 놀라자 옆에 있던 직원이 “탱크주의 제품이거든요”라고 대답한다.

또 다른 광고에서는 유인촌이“올해 탱크주의를 발표하셨는데 아주 강한 느낌이 들던데요”라고 하자 배 사장이“ 네, 탱크주의는 2000년까지 쓸 수 있는 튼튼하고 편리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죠”라고 말한다.

 

이 광고는 대우전자 구미공장에서 촬영했다. TV 200여 대와 임직원 100여 명이 엑스트라로 동원됐다고 한다. 배 사장의 출연료는 없었다.

 

배 장관의 말.

“내가 회사 CEO인데 무슨 광고료를 받아요. 무료로 출연했어요”

탤런트로 승승장구하던 유인촌 씨는 이명박 정부 출범하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현 예술의 전당 이사장)으로 발탁됐다. 2009년 2월 배 전 장관은 문체부 산하기관인 국립 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됐다. 그에게 임명장을 준 사람이 유인촌 장관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기업 CEO와 전속 광고모텔 관계가 장관과 산하기관장으로 만난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알 수 없었다.

 

대우전자 회장시절인 1996년 배 회장은 프랑스 국영기업으로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톰슨 멀티미디어 인수전에 나섰다. 그해 10월 17일 프랑스는 톤슨멀티미디어를 대우전자에 넘기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국가최고위원회가 부결시켜 성사직전 무산됐다.

 

배 회장은 1998년 1월 프랑스 대우전자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업무시작 2개월 여만에 김대중 정부 각료로 입각(入閣)해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사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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