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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88>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1. 3. 1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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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자격심사가 끝나자 정보통신부는 2차 사업계획서 심사의 봉화를 올렸다.


1996년 5월 23일.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충남 아산 한국통신 도고수련원(현.KT 도고수련관).

하얀 미소를 함박 머금은 아카시아꽃의 달콤한 향기가 수련원 주변을 휘젓고 다녔다.


이른 아침, 상큼한 공기를 가르며 검은 승용차 한대가 도고수련원 현관으로 들어왔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은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현 KT회장)이었다.


이 장관은 도고수련원에서 합숙을 하며 신규통신사업자 향방을 가릴 사업계획서를 심사할 심사위원들과 조찬을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사진.전자신문>



정보통신부는 이날부터 PCS와 TRS 등 7개 분야에 대한 사업계획서 심사를 6월1일까지 10일간 도고수련원에서 진행키로 했다.


이 장관은 수련원 식당에서 심사위원들과 조찬을 한 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심사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것은 장관으로서 당연한 부탁이었다. 아무리 심사가 공명정대하게 이뤄져도 그 결과가 특정업체에 유리하다면 상대 업체에서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당연히 문제를 제기할 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었다. 기업간 이해가 걸린 심사에서 공정성이 최선의 방어책이었다.


사업계획서 심사는 도고수련원 4층과 5층에서 실시됐다.

심사위원들은 1인 1실을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도고수련원에는 외부 접근이 철저히 통제됐다. 육지속의 외로운 섬처럼 외부 세상과 단절시켜 철통 보안을 유지했다.


이 장관은 이날 조찬을 마친 후 서울로 돌아와 정통부 기자들과 간단회를 가졌다.


이 장관은 “6월1일까지 사업계획서 심사를 끝낸 후 청문평가 등을 거쳐 사업자를 발표하겠다. 그러나 경쟁상대가 없는 분야나 지역사업자에 대해서는 청문절차를 생락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거듭 "심사작업은 최대한 공정하게 처리하겠다. 심사위원은 기준에 맞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학기 중에 대학교수를 열흘씩 빼내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심사위원 선정기준과 관련해 “심사위원 선정기준은 해당분야의 전문가로 실력이 있으면서 평판이 좋은 사람 가운데 (통신사업신청기업과) 연관이 없은 사람 위주로 선임했다”면서 “ 전공분야도 경영쪽은 법률 회계 경제학등으로 고루 안배했다"고 설명했다.


이 장관은 “심사위원 구성은 대학과 연구기관 등에서 고루 뽑았고 교수는 서울과 지방, 국립과 사립 등 골고루 선정했다. 심사는 기술과 경영분야로 나눴다“고 밝혔다.


이 장관의 말처럼 심사위원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대학 등에서 분야별 전문가 42명으로 구성했다. 주로 해당분야의 박사급 전문 인력이었다. 기술부문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인력이 주류를 이뤘다., 사업. 영업부문 등의 평가인력은 통신개발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 인력이 다수를 차지했다.


심사위원 선정 실무를 담당한 이규태 통신기획과장( 정통부 감사관. 서울체신청장 역임, 현 한국IT비즈니스진흥협회 부회장)의 말.


“사전에 각 분야별 저명한 전문가들로 리스트를 만들어 장관까지 결재를 받았습니다. 사업계획서 제출기업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은 모두 배제했어요. 그런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넣었다간 특혜시비에 휘말릴 수 있었습니다. 심사위원 선정과 통보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다른 일정이 잡혀 있거나 아니면 심사위원 참여를 고사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예비 위원에게 통보를 했습니다. 심사위원 최종 통보는 심사일 하루 전에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돼 기술반장으로 일했던 박항구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이동통신기술연구단장(현 소암시스템회장)의 증언.


“심사위원 위촉과 관련해 정통부에서 사전에 일정 등을 물어 봤어요. 나중에 심사위원 선정 통보를 받고 합숙할 준비를 해 도고수련원으로 들어갔지요. 10일간 지내려면 옷가지 등 준비할게 많잖아요. 일단 들어가서는 외부와 일체 연락을 하거나 외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창살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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