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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애니콜 신화" 삼성전자 창립 40주년

문화. 관광.게임

by 문성 2009. 10.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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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년 전에는 삼성도 반도체 장사를 하느냐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밀라노와 뮌헨, 런던 스톡홀롬 등 구라파(유럽)에 8개 오피스(사무실)가 있었는데 그때는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죠. 삼성이 뭐 하는 회사냐. 몇 달 만에 문 닫으면 어떡하느냐, 갑자기 문 닫을 수도 있으니 3년치 임금 내놔라. 사람을 뽑으려던 내가 오히려 인터뷰를 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최지성 삼성전자 DMC(제품) 부문 사장은 지난 9월 독일 가전박람회 때 현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독일 주재원 시절 겪었던 `무명 기업'의 설움을 단적으로 그렇게 표현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초일류기업이자 세계 100대 기업의 브랜드 가치 순위에서 19위(175억달러)에 올라 있는 삼성전자가 11월 1일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삼성전자는 30일 서초동 사옥에서 이윤우 부회장을 비롯한 임직원과 윤종용 고문, 진대제 전 사장 등 옛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열고 새로운 40년을 위한 비전을 선포할 예정이다.

 ◇"출발은 미약했으나..." = 삼성전자는 1969년 1월 자본금 3억3천만원으로 출범할 당시(창립기념일은 삼성전자와 삼성반도체통신이 1988년 합병한 11월1일) 종업원 36명을 거느린 `구멍가게' 회사였다.

   하지만 탄생 40년 만에 국내에 9개 사업장(서초사옥 포함)과 전 세계 13개 국가에 생산공장을 둔 직원 15만여 명(국내 8만3천588명 반기보고서 기준)의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단순한 외형만 커진 게 아니다. 4천만원에 불과했던 첫해 매출은 올해 130조 원을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

 처음 수출을 시작한 1972년의 연간 매출은 18억4천만원, 영업이익은 1억4천만 원이었다.  이때와 비교해도 매출은 6만4천배(작년 기준), 영업이익은 7만1천배(올해 예상 10조원 기준)가 늘었다.당시 80원이었던 대중목욕탕 요금이 50~60배 오르는 등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더라도 믿기 어려운 성장을 이룩한 셈이다.

 아시아의 이름없는 삼류 전자회사에 불과했던 삼성전자가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1983년 2월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도쿄 선언'이었다.

 삼성전자는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손을 댔지만, 도쿄 선언 전까지는 별다른 실적을 내지 못했다.

  이병철 회장은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국내외에서는 당장 '삼성이 반도체를 하면 망한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자본과 기술, 시장이 없다는 이른바 '3불가론'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기흥공장 착공에 나섰고 통상 18개월 이상 걸리는 반도체 공장을 6개월 만에 지었다. 그 해에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64K D램을 개발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2년 삼성전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D램 시장 1위에 올라섰다.   물론 그 사이 우여곡절도 많았다.

 도쿄선언이 있은 지 4년여가 지난 1987년 9월.

당시 한 신문에 '국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제품은 모두 외국 제품의 복제품에 불과하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남동 자택을 떠나 기흥사업장으로 향했다. 당시 노구를 이끌고 온 선대회장을 맞은 사람은 이윤우 상무(현 부회장)와 진대제 담당(전 사장)이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우리가 남의 것을 베꼈다는 게 사실인가.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 100년 동안 세계를 제패했다. 내가 기껏 남의 것을 모방하기 위해 반도체 사업을 했겠느냐"라고 소리쳤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실이) 아닙니다. 다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계 시장을 석권하겠습니다"라고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반도체 산업은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의 증기기관과 같은 가치가 있었고, 그 혁명은 올해 삼성전자가 D램 시장 점유율에서 40%에 육박하는 절대강자의 지위에 오르도록 하는 열매를 낳았다.

   ◇변화와 혁신, 그리고 또 혁신..글로벌 기업으로 = 삼성전자는 D램 시장의 강자로 올라서고 나서 재도약을 준비했다.

   이병철의 별세로 1987년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건희 전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경영진을 소집하고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며 강도 높은 혁신을 주문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알려진 이 전 회장의 '신경영'은 소니를 비롯한 세계적인 전자회사를 넘어서려면 모방이 아닌 변화가 필요하다는 질책이었고 당부였다.

   이듬해인 1994년 삼성전자는 첫 아날로그 휴대전화를 내놓고, 외국 휴대전화가 주류를 이뤘던 국내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D램 신화'에 이은 '애니콜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때가 변방의 가내 수공업 수준의 전자회사에서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으로, 다시 세계적인 IT·전자 회사로 거듭나는 시기였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1997년부터 '제값 받기 전략'을 펼친다.

   싼 가격으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인정하고 제값을 낼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일류 제품을 만들어 세계적 명성의 브랜드 이미지를 확보함으로써 '이익이 남는 성장'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삼성전자는 글로벌 불황 속에서도 올해 사상 처음으로 연매출 100조원에 연간 영업이익 10조원 돌파를 동시에 기록하는 빛나는 업적을 쌓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도 연간 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10조원을 자랑하는 제조업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리더 기업으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려면 지금까지 어렵게 확보한 시장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수성(守城) 전략과 새 시장을 개척하고 만들어 가는 공격 경영을 조화롭게 구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새로운 40년이 어떻게 펼쳐질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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