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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27>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1. 8. 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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퀄컴은 전자교환기 기술이 부족했다.
설계능력은 우수했지만 대량생산이나 제조기술이 취약했다. 미 퀄컴사는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국기업 인수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


박헌서 회장의 계속된 회고.

“퀄컴 제이곱스 사장을 만났더니 한국의 맥슨전자를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귀국해 맥슨전자 윤두영 회장(현 미국거주)을 만나 퀄컴측의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퀄컴에서 ‘인수의사를 가지고 있던데 혹시 의향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 회장이 그냥 씩 웃고 넘기시더군요. ”


윤 회장는 일동제약 창업주인 고 윤용구회장의 장남이다. 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72년 인켈의 전신인 인터내셔날 일렉트로닉스를 설립했다. 이후 이 회사를 동원전자에 넘긴 후 74년 맥슨전자를 설립했다.


이원웅 ETRI 부소장의 말.

“기술료를 주느니 퀄컴사를 인수하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돌긴 했습니다. 실현가능성이 없는 아이디어 차원이었습니다. ETRI는 그런 검토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장과 감사 등 경영진을 파견해야 하는 점도 문제지만 미국에서 한국식으로 경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


체신부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의 증언.

“ 만약 국내 기업이 단독으로 퀄컴에서 기술을 이전받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CDMA개발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미국이 CDMA기술을 표준으로 결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미국 기업이 특허권을 가진 기술이고 퀄컴이 로비를 벌여 미국표준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미국은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시스템은 정부가 단일표준을 정하지 않고 업계가 다수결로 결정했다.



당시 언론은 퀄컴사가 규모가 적고 경영난이 극심한 것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고 한다.


퀄컴사를 수차례 방문했던 이혁재 ETRI 부장(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의 회고.

“퀄컴이 처음 시작할 때는 벤처기업이었겠지만 CDMA기술을 개발했을 당시는 인원이 700-800명에 달했습니다. 퀄컴 경영진인 어원 제이콥스와 앤드류 버터비는 80년대까지 통신공학의 최고봉이었습니다. 퀄컴사는 미국에서 위성통신시스템을 이용해 차량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옴니트랙스라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가입자가 많았습니다. 그 사업에서 수익을 내고 있었어요. ”


ETRI 이영규 본부장(TTA전문위원 역임)의 말.

“역사는 결과론 입니다. CDMA개발이 성공하니까 호사가들이 퀄컴인수 등의 말을 하는 것이지 당시는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CDMA성공여부조차 불투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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