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양측은 그해 7월1일부터 국제VAN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도 합의했다.
이인학 단장의 회고.
“대표단은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협상에서 접점을 찾아 한미간 통상마찰을 완화했고, 국제VAN에서 한미양국이 상호협력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했어요. 대표단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김창곤 과장의 증언.
“한국이 선전(善戰)한 회담이었습니다. 미국은 국제VAN 첫 회담때부터 조기에 시장을 개방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이런 요구를 1994년까지 시기를 늦춘 것입니다. 협상에서 그런 일이 쉽지 않습니다. 미국측은 국제VAN개방에 관한한 강경 입장이었습니다. 미국통신업체들의 이해가 걸려 있었거든요.”
언제나 그랬듯 양측 대표단은 국익을 지키기 위해 기(氣)싸움을 벌였고 온갖 전략을 다 구사했다. 실무에 밝고 상황판단력이 뛰어난 이인표 단장은 회담 중 분위기 전환을 위해 중간에 한국 대표단을 회담장 한구석으로 불러 야단을 치기도 했다. 마치 농구팀 감독이 선수단을 불러 작전지시를 하는 모습과 같았다.
김창곤 과장의 계속된 기억.
“어느 때는 회담장 뒤편에 병풍처럼 가린 뒤편으로 대표단을 불러 기합을 주고 그랬습니다. 그게 다 협상의 전략이었습니다. ”
한미양측은 회담이 타결되자 국제VAN약정안을 만들어 양측 수석대표인 이인표 단장과 낸시 애담스 부대표가 가(假)서명을 했다.
이 가서명한 내용은 그해 6월 26일 서한으로 상호교환키로 합의하고 이런 내용을 한미 양허록(ROU)으로 작성해 교환했다.
양허록에서 한미 양측은 △ 한국정부는 이전 협상에서 양국간에 작성한 양해록에서 약속한 바 있는 전기통신에 관한 사항을 이행하며 △ 한국정부는 금번 국제VAN약정을 위해 양해록 내용에서 일탈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행하고 이 서신 교환에 의한 서비스 범위는 상기 양해록 사항보다 확대한 것으로 해석하며△ 양국 정부는 국제 VAN약정과 기존 양해록에서 언급된 과제들을 포함한 현안에 대해 견해차를 해소할 것을 기대하면서 1992년 2월까지 계속 협의를 하고 △ 미국정부는 본 양해록에 관한 미국정부의 견해를 밝히는 서신을 1991년 6월26일자로 한국정부에 송부한다는 점을 약속했다.
한미 양측은 한국의 민간업자가 제공하는 VAN서비스의 종류를 국제 데이터 베이스(DB), 데이터 프로세싱(DP), 전자 매일(E-MAIL)등으로 규정하고 앞으로 개방할 국제 VAN 서비스 시작에 필요한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정했다.
그러나 미처 세부적인 사항까지 합의하지 못한 투자제한과 공정경쟁 보장 등은 별도의 회담을 통해 합의하기로 했고 미국측 통신망과 접속, 운용하는 기술적인 문제도 추후 재론키로 했다.
이 무렵, 체신부장관 자문관으로 한미통신회담에서 핵심역할을 하던 성극제 박사가 2차 VAN회담이 끝난 후 그해 6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박사는 초창기부터 한미통신회담에 깊숙이 관여해 회담의제와 대응전략 등을 마련했고 회담장에서 양측의 통역까지 맡았다.
그러다보니 회담과정에서 일화기 적지 않았다.
회담장에서 한국측 수석대표가 1분 발언한 것을 5분여로 늘려 통역을 하거나 미국측 수석대표가 5분여 발언한 것을 1분으로 줄여 통역하는 일도 간혹 발생했다.
한국측 수석대표가 발언한 내용이 미진하면 통역이 나서서 바로 잡아 주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는 한국측 수석대표가 묻지 않은 미심적은 내용도 대신 깐깐하게 미국측에 자주 따졌다. 중간에 수석대표의 발언을 자르기도 했다.
한국측 대표로 나온 외교부 관계자가 “당신이 뭔데 나서서 수석대표의 발언을 중단하고 발언 내용을 수정하느냐”며 반발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한국측 수석대표였던 박성득 체신부 통신정책국장(정통부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이 나서 “성 박사는 단순히 통역만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해 분위기를 가라앉힌 적도 있다.
미국측 대표단이 ‘성박사의 통역이 지나치게 한국측 이해만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며 미 대통령 통역을 담당했던 사람을 통역으로 데려 온 적도 있다.
성 박사의 증언.
“한번은 미 대표단이 통역을 별도로 데리고 왔더군요. 저야 편하죠. 그런데 미국대표단이 나중에 저보고 다시 통역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통신분야에 관한 내용을 모르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회담에서 아는 척하거나 건성으로 협상을 하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의문이 나면 꼭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제가 수석대표의 발언내용에 더 보태거나 빼고 했던 점은 사실입니다.”
그는 김영삼정부 시절 청와대 경세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DDA협상대표 등을 지낸 후 1995년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부원장, 원장 등을 역임했다.
성 박사의 바턴을 이어 받은 사람이 최병일 박사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예일대 경제학박사로 1989년부터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근무했다. 최 박사는 체신부 장관 자문관으로 12층 장관실 옆 사무실에서 한미통신회담 의제와 대응책 등을 마련하는 등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양국의 쟁점중의 하나였던 국제VAN에 대해 양측이 약해록을 작성함에 따라 양측 대표단의 어깨는 그만큼 홀가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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