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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41>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1. 10. 10.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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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마지막 협상인 10차 한미통신회담은 1992년 2월11일부터 17일까지 미국 워싱턴 DC 미 USTR회의실에서 열렸다. ‘타결이냐 결렬이냐’를 판가름하는 최종 담판장이었다.


타결 여부에따라 한국은 미국측의 무역보복을 감수해야 할 처지였다. 양측은 당초 14일까지 였던 회담일정을 3일 더 연장했다. 양측의 타결은 쉽지 않았다.


한국측에서 이인표 단장과 체신부 박창환 통신진흥과장, 김원식 정보통신기술과장, 노영규 통신협력과 사무관, 자문위원으로 최병일 체신부장관 자문관이 참석했다. 경제기획원 김명식 통상조정2과장(한국화재보헙협회 상무 역임)과 외무부 박상기 통상2과장, 상공부 장지종 통상협력관실 과장(중기청차장 역임. 현 중소기업연구원장)등도 참석했다.


미국측에서는 낸시 애담스 USTR부대표와 국무부, 상무부, 전기통신정보청 관계자 등 8명이 참석했다.

이인표단장은 회담에 앞서 “한국측이 양보할 것은 다 양보해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다”며 배수진을 쳤다.


양측 대표단은 진통 끝에 서비스분야와 기기분야, 정부조달 등에서 합의안을 도출했다. 양측은 한국의 부가가치통신(VAN)시장에 참여하려는 미국인의 투자제한을 오는 94년1월부터 해제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92양해록’을 작성, 수석대표들이 17일 서명했다.


이에 따라 지난 89년2월 미국이 한국을 통신시장개발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한 후 3년간 계속돼온 협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김원식 기술과장의 증언.

“저는 정부조달 분야를 담당했습니다. 이 단장이 조달부문의 표준과 형식승인 등에 관해 미국측 실무진들과 협상을 타결지으라고 지시해 미국 상무성과 USTR 관계자와 협상을 했습니다. 처음엔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한국측이 논리적으로 대응하자 그들이 당초 주장을 철회해 일찍 협상을 끝냈습니다.”


최병일 박사의 회고.

“한미통신회담은 성공한 통상회담이었습니다.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미국 USTR은 미국업계의 대변자이거든요. 한국통상회담사(史)에서 한미통신회담은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


양측이 합의한 내용은 통신기기 조달과 관련, 한국통신(현 KT)과 조달청이 구매하는 일반 통신기기의 조달을 GATT정부조달협정 절차에 따라 1992부터 개방하기로 했다. 또 통신망장비는 93년1월부터 새로운 경쟁조달 절차에 따라 개방하며 미국측도 통신장비를 구매할때 외국인에게 차별대우를 하지 않기로 했다.


양측은 기업간 전용회선의 공동사용범위의 확대, 신청절차 간소화, 이용제한의 완화 및 통신산업 공정경쟁 보장제도의 도입 등에 관한 규제도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형식승인시 시험성적서도 상호인정하기로 했다.


이같은 회담 합의에 이르기 까지 한미양측은 모두 10차에 걸쳐 위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회담을 진행했다.


8차 한미통신회담은 하와이에서 30여간 가야하는 마우이섬 칼라팔리비치에 있는 웨스턴호텔에서 열렸다. 양측은 합의점을 찾기 위해 창문이 없는 곳을 회담장으로 정했다. 그곳에 들어가면 밤인지 낮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밖에 나오면 해안의 낙조가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한국 대표단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교용 과장의 계속된 증언.

“우리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하나도 없는데 미국측 대표단은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미국측은 느긋했지요. 우리가 미측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하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측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이런 우역곡절끝에 한국은 통신시장 개방이란 신조류에 뛰어 들었다. 통신시장개방은 한국통신산업계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기의 시그널이었다. 그 선택은 우리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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