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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갈등 왜? <1>

과기정통. ICT. 국방

by 문성 2011. 11. 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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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 설킨 한미 FTA 비준안 처리에서 한나당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하나는 한나라당 단독으로 처리하는 일이다. 이는 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야당에 밀려 마냥 미적거릴수도 없다. 미룬다고 뽀쪽한 해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각종 괴담이 나돌아 여론이 나빠질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명분을 쌓아 강행처리할 수 가능성이 높다.  단독처리 경우 야당이 반발해 새해 예산안을 거부할 수 있다. 이는 감수해야 할 후폭풍이다.<사진은 국회본회의장>


다른 하나는 야당의 요구를 수용해 합의처리하는 일이다. 가장 바람직하지만 여야간 전제조건을 제시해 타결 가능성이 낮다. 여.야 지도부의 정치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야당 강경파가 이를 수용할지도 문제다. 잘못하면 가득이나 자중지란인 한나라당이 자멸할 수 있다.

 

민주당 온건파가 서작작업을 하는 절충안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절충안은 “정부가 비준안 발효 즉시 ISD 존치 여부에 대한 협상을 시작한다는 약속을 미국에서 받아오면 비준안 처리를 막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이 안도 상대가 있는 만큼 성사여부는 불투명하다.  

 
외국과 통상협상이란 게 주고 받는 것이어서 어느 한쪽이 완전한 이익을 챙길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번 한미TFA를 놓고는 내부갈등이 극심하다. 왜 그런가.

 

이제까지 외국과 통상회담에서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미통신회담을 분석해 보면 해답이 보인다. 더 치밀하고 더 이해당사자들과 소통했더라면, 그리고 국익을 고려해 협상을 했다면 이처럼 사태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협상대표단은 국익을  최우선했다지만 그렇게 생각안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게 문제다. 


 학계나 산업계, 정부내에서 한미통신회담을 높이 평가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국익에 철저했다. 다른 정치적 고려는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나 장관들도 대표단에 훈수를 두지 않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한미통신회담과 UR서비스협상. WTO통신회담 한국대표단으로 활동했던 통상전문가인 성극제박사 (경희대 국제대학원교수)나 최병일박사(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교수) 등은 지방행정연수원 등에서 통상전문가 교육에서 “최악의 통상협상사례는 2000년의 한중마늘협상이며 가장 성공한 사례는 한미통신회담”이라고 단언했다. 실제 교육을 통해 협상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한미통신회담은 1987년부터 시작해 타결까지 장장 10년을 끌었다. 정권과 무관했다. 장관과 수석대표가 교체되도 국익우선이란 회담의 기본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통신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슈펴301조를 업고 한국에 대해 무차별 압력을 가했다. 미국은 한국이 고분고분하지 않자 한국은 두 번 씩이나 통신분야 우선협상국(PFC)로 지정했다. 당시 외교라인은 정통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미국을 자극해 수출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한다는 논리였다. 
 

처음 미국이 한국통신시장 개방을 압박할 무렵, 체신부는 통상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이 안돼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미국을 상대로 통신분야 협상을 시작했고 철저한 준비와 대응전략을 마련해 국익을 지켰다.


이제부터 한미통신회담의 성공요인을 분석해 보자.
 

첫째, 정부의 철저한 준비였다. 체신부는 미국이 통신시장 개방을 요구하자 통신산업의 정책기조를 ‘선(先)국내산업 육성, 후(後)시장개방’으로 전환했다. 시장개방에 따른 파급효과를 분석해 그에 대한 육성책을 마련했다. 경쟁력만이 살길이었다. TDX에 이어 CDMA개발을 밀어붙여 성공시켰다. 통신산업의 독점체제는 경쟁체제로 전환했다.  돈으로 보상하는 게 아니라 경쟁력을 갖춰 미국통신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한편 협상에 대비해 협상대표단은 협상이론과 실무를 익혔다. 미국측 로펌을 고용해 미국측의 전략을 파악하고 미측 주장의 허점을 파고 들었다. 정부는 범정부차원에서 대책반을 구성해 시나리오별 대응방안을 강구했다. 이렇게 마련한 훈령을 수석대표에 내렸다.

 

미국이 한국통신의 장비 공급을 문제삼았을 때 정부는 대표단에 이해당사자인 한국통신의 담당국장을 참여시켰다. 한국통신은 미국통신업체와 별도 라인을 구축해 타결책을 모색했다. 정부는 이해당사자인 통신업계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통해 전략을 마련하고 회담후에는 설명회를 열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런 노력이 회담에서 최선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디딤돌이 됐다.

 

1996년 미국이 한국통신(현 KT)의 교환기 조달과 관련해 한국정부가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측이 제시한 문건이 PCS사업권신청시 제출 서류에 제품 모델명을 기입하도록 한 것이었다. 한국측 대표단은 미국측의 정보력에 혀를 내둘렀다. 한국측 수석대표인 서영길 정통부 국제협력국장(현 IGM경영연구원장)은 미국의 대형로펌을 통해 미국FCC(연방통신위원회)서류 수천종을 검색해 그중에서 3개서류에 모델번호를 기입하는 것을 찾아냈다. 이를 토대로 미국측의 무리한 요구를 철회시켰다.  

준비가 철저하니 협상테이불에서 미측과 논리대결에서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측을 설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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