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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290>이상만 높았던 범국민 정보화운동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3. 11. 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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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의 구상은 창대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그보다 도 높았다.

 

추진본부는 이날 각계 전문가와 협의해 제정한 정보화 기치로 `포인트(POINTS)2010'을 선포했다. 포인트 2010은 한반도의 정보화, 네트워크화, 과학기술화를 의미했다.

 

추진본부는 2010년까지 세계 22위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5위로, 정보화 지수를 20위에서 5위로, 국내 총생산도 현재 11위에서 5위로 , 국제경쟁력도 35위에서 5위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또 국내 및 해외의 각계 전문가로 국내.외 자문위원회를 구성고 추진본부장 산하에 운영위원회와 산업정보화, 지역정보화, 국제정보화 등 10개 실무기획단을 설치하기로 했다.

 

해외자문단에는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박사를 비롯해 빌게이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회장, 루 거스너 미국 IBM회장, 그레이그 배럿 미국 인텔사장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추진본부는 정보화정책에 대한 진단 및 단기정책을 기획하는 1단계 단기연구과제(98-2000년)에 이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화, 경제, 문화정책을 기획하는 2단계 중기연구과제(2001-2005년), 미래사회에 대비한 장기적인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3단계 장기연구과제(2006-2010)를 수행하기로 했다. 하나 같이 원대한 구상이었다.

정 의원의 배경 설명

 

“지난 4월 7일 김 대통령과 앨빈 토플러 박사와 접견하는 자리에서 ‘국민의 정보화를 위한 중심기구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김 대통령이 ‘그것 참, 좋은 의견’이라며 저한테 추진기구 설립을 지시하셨습니다. 새마을 운동 정신은 ‘근면 자조 협동’ 인데 한반도 정보화 구호는 ‘1인 1PC' '1인 1홈페이지’‘1인 1발명’으로 정했습니다. 각계 전문가들과 모두 5차례의 사전준비 모임을 가졌습니다.”

 

정보화 범국민 운동은 1996년부터 정 의원이 구상했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정 의원은 오해석 숭실대 부총장과 남궁석 삼성 SDS사장, 곽치영 데이콤 사장 등과 기획안을 만들었다.

 

오해석 부총장의 회고.

“정보화 추진본부에 한반도라는 명칭을 넣는 것은 제 아이디어입니다. 1차로 국내 정보화를 추진하고 이어 북한까지 정보화 깃발아래 하나로 뭉치게 하자는 의미였습니다. 실무 작업에는 ETRI등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전문 인력을 지원받았습니다 ”

추진본부가 출범하자 정보통신부는 그해 8월 4일 추진본부에 사단법인 설립을 허가했다.

 

그해 9월9일.

한반도정보화추진본부는 서울 여의도 삼보컴퓨터빌딩 17층에서 창립 1백일 축하행사 및 사무처 개소식을 가졌다. 이 사무실은 이용태 이사장이 무상 제공했다.추진본부는 출범 후 정보화 소외계층에 대한 컴퓨터 교육, 농어촌 컴퓨터 보내기 운동 전개 등을 의욕적으로 전개했다. 배순훈 정보통신부장관과 진념 기획예산위원장 초청해 포럼을 열였고. 빌게이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초청해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을 주선했다.

 

정 의원의 말.

“ 지식 정보국가, 정보기술선도 국가, 사이버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는 길은 오직 정보화에 달려 있습니다. 자라나는 꿈나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보화’ 이라는 구호 아래,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욕적인 범국민 정보화 운동은 1년쯤 지나면서 차츰 추동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우선 예산과 인력,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다. 김 대통령의 정보화 신념과 의지도 후퇴했다. 김 대통령의 초기 국정 키워드는 ‘정보화’와 ‘외환위기’였다.

하지만 집권 후반기 들면서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 세 아들의 비리연루로 인해 정보화는 국정 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추진본부 업무를 총괄하던 정 의원이 1998년 지방선거와 관련한 공천 헌금 의혹에 휘말렸다. 그는 1999년 9월 국회에서 삭발투쟁을 하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2000년 4월 제16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후 추진본부는 개점휴업 상태로 접어 들었다. 정보화 구호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이용태 이사장의 회고.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정 의원에게 혼자 뛰지 말고 유력 정치 실세들을 이 운동에 참여시키라고 말했어요. 후원세력이 필요한데 그게 잘 안됐어요 ”

 

정 의원의 말.

“1998년 6.4 지방선거 당시 국민회의 나주시장 공천헌금과 관련해 상대측이 문제기를 제기했어요. 정치적 모함이었어요. 삭발투쟁까지 했지만 결국 16대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해석 부총장의 말.

“정 의원의 정보화 운동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처음엔 김 대통령과 독대해 국민운동이 탄력을 받았습니다. 그가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정치력을 상실하자 추진본부 활동도 흐지부지 됐습니다. 정치력 부재가 한 몫을 했어요”

 

범국민 정보화 운동의 이상(理想)은 높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더 높았다. 상향식이 아닌 하향식 국민운동의 한계였다. 정보화 운동은 결국 미완의 운동으로 종언을 고했다. 어찌보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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