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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법왕사 (2)

사찰기행

by 문성 2018. 11. 2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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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차를 내리면 칠성안을 병풍처럼 세운 법왕사 모습은 장관이다. 정면 정원석 위에 5층 석탑과 지장보살상, 양청우스님 사리탑, 그 옆에 정암스님 공덕을 기려 20024월에 신도들이 세운 정암 대화상 중창공덕비가가 우뚝 서 있다.

가운데 난 돌계단을 올라가면 배산임수 지형인 법왕사가 위용을 드러낸다. 뒤로 칠성산이 병풍처럼 서 있고 바로 앞에는 맑은 냇물이 1년 내 흐른다.

산중에 이처럼 대규모 사찰이 있다는 게 경이롭다. 마당 중앙에 거대한 대웅전과 천불전이 정좌했고 오른쪽에 일곱 부처를 모신 칠불전, 칠불전 앞에 미륵보살상, 약사여래불, 초전법륜상을 모셨다. 대웅전 왼쪽에는 세심선원과 범종각, 공양간이 자리잡았다.

법왕사는 구조가 다른 사찰과는 다르다. 비탈진 계곡에 건물을 짓고 그 위를 마당으로 만들어 다시 법당을 지었다. 해량식으로 건물을 지는 사찰은 법왕사가 국내에서는 유일이라고 한다.

정암 스님이 이런 구조 사찰을 짓게 된 계기는 인도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나서 그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인도에 그런 사찰이 있었다. 정작 국내에 이런 방식으로 불사를 추진하자 목수들이 이견을 제시했다.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건축 방식인 까닭이었다. 하지만 막상 불사를 끝내고 보니 편리하고 경제적이었다. 하지만 훗날 이 불사로 인해 스님은 법적 소송에 휘말렸다.

법왕사는 국가가 지정한 전통사찰이다. 대지만 2,200여 평에 달한다. 법왕상 대웅전은 가히 국보급이다. 교구 본사 대웅전에 버금간다. 이층구조로 넓은 대웅전은 국내에서 하나 뿐이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다.

한아름이 넘는 대웅전 기둥과 서라래는 백두산 적송(赤松)이다. 법왕사 전신은 칠성암이다. 현재 주지는 정암 스님이다. 이곳에 주석한지 내년이면 50년이다. 은사인 청우스님이 인법당으로 마련한 법왕사를 오늘날 대 가람으로 중창했다. 20대 혈기 넘치는 스님은 청우 스님 뜻에 당시 전남 강진 백련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고 이곳으로 왔다. 그게 50여 년 전이다.

당시 청우스님은 제자 16명을 모두 불러 후임 주지를 직접 낙점했다. 평소 정암스님의 그룻 크기와 청렴한 일처리를 눈 여겨 봐 오다가 주지직을 맡겼다고 한다. 정암스님은 해인사 선방에 방부를 든 상황이지만 은사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청우 스님께 “6개월만 소임을 맡겠다고 한 게 어느듯 50여년이 된 것이다.

법왕사는 정암스님이 주지로 부임하고 나서 하루가 다르게 면모가 변했다. 우선 부처님의 정법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사찰명을 칠성암에서 '법왕사'로 변경했다.이어 대웅전을 시작으로 하나 씩 중창 불사 시작했다. 대웅전 불사를 백두산 적송으로 시작한 일은 우연이었다.

대웅전 불사를 놓고 고민하던 어느 날. 절에서 일하던 한 목수가 인천항에 북한산 아름드리 소나무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업체가 부도나 처리를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인천항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가보니 국내에서는 볼 수도 없고 구할 수 없는 백두산 소나무가 쌓여 있었다. 스님은 이 소나무를 구입해 법당 중창불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이지역 유력 정치인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인 모씨가 불사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거액인 불사비를 쾌척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믿고 스님은 불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호사다마였다. 그 신자는 불사비중 일부만 부담하고 손을 뗐다. 스님은 난감했다. 그렇다고 불사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스님은 일념으로 기도하며 불사에 전념했다.

그러자 전혀 예상외의 일이 일어났다. 국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가 부인들이 불사 소식을 듣고 앞다퉈 동참했다. 당시 기둥 하나에 3천만 원, 대들보 하나네 수백만 원씩인데 이들이 불사에 참여했다.

또 어느날은 노비구니 스님이 이곳을 찾아왔다. 불사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이 가진 전재산 1억 원을 불사비로 내놓고 갔다.

스님은 "이런 일이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중창불사 과정에 위험한 고비도 겪었다. 대웅전 터잡기 불사 중 스님이 공사현장 6미터 높이에서 낙상을 한 것이다. 큰 사고였다. 6개월 가량 하반신 마비로 앉은 뱅이 생활을 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강릉시내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스님은 죽음을 생각해 본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부처님 법을 설파할 것이며 부처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 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스님은 법왕사로 돌아왔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더 이상 절을 떠날 수 없었다. 어느 날, 진부에 사는 신도가 찾아왔다. 그리고는 전나무 잎으로 즙을 내 먹으면 허리에 좋다고 했다. 그 신도는 6.25당시 진부 사람들이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산군으로 인해 고초를 많이 겪었고 그 과정에서 허리를 많이 다쳤다고 했다. 당시 전나무잎 즙을 내 먹고 효험을 봤다고 했다. 스님은 당시 지프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전나무 잎으로 생즙을 내 먹었다당시 법왕사 주위에는 스님이 월정사에서 얻어다 심은 전나무 20여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스님은 전나무 잎을 따 막걸리를 넣고 즙을 내 마셨다소태보다 더 쓴 맛이었다. 정말 신통한 묘약이었다. 거짓말처럼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되찾았다. 중단했던 불사를 진행했다. 난관을 이겨내고 2000115일 대웅전을 완공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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