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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166>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2. 1. 1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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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부 새 수장(首長)인 강봉균 장관(사진)은 누구인가.

그는 고난을 딛고 성공한 엘리트경제관료다. 그는 지역차별이 상존하던 영남출신 대통령 정부에서 최고의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3.4.5.6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주도했다. 그는 일에 관한한 똑소리가 났다.


강 장관은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나 군산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뒤늦게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강봉균 장관의 말.


“5.16군사정변이 나던해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어요. 혁명공약에 국민의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게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경제를 공부해 국가빈곤을 타파해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2000년에 펴낸 그의 자서전 ‘초등학교 교사에서 재경부장관까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무렵 나는 재건국민운동의 청년회와 부녀회 지도교사로 활동하면서 농촌 근대화 현장에 있었다. 박 대통령이 초등학교 교사 3년만에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도 대학진학의 결심을 굳혔고, 마침내 독학으로 1964년 서울상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해인 1969년 행정고시 6회에 합격,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강 장관은 사무관시절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해 기획능력을 인정받았다.


그후 4차,5차,6차 등 4번이나 경제개발계획 입안을 주도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개발시대 ‘최고의 보직’이라는 경제기획국장을 두 번씩이나 맡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강 장관과 이석채 청와대경제수석(현 KT회장), 한이헌 전 청와대경제수석(15대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장) 등을 경제기획원의 트로이카로 불렀다.


전두환 정부시절인 1985년부터 4년간 경제기획국장으로 장수하면서 10%이상 고성장과 3%수준의 불가안정, 국제수지 흑자라는 3마리 토끼를 잡는데 기여했다. 그가 모신 경제부총리만 해도 신병헌, 김만제, 정인용, 나웅배씨 등 4명이나 됐다.


경제부총리가 바뀔때마다 경제기획국장 교체여부가 관심이었다. 하지만 4명의 부총리는 강국장은 바꾸지 않았다.

그는 1990년 4월3일 두번 째 경제기획국장으로 발령났다. 노태우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금융실명제 도입을 철회하자 한이헌 국장이 물러난 후였다. 두번 째 경제기획국장 재임기간은 한 달도 안됐다. 그해 5월1일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승진했다. 관례를 벗어난 파격적인 승진인사였다. 그는 차관보로 4년간 일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정권이 교체돼도 그는 차관보 자리를 지켰다. 이도 기록이었다.


그는 한국경제개발의 전도사로 개발도상국에 성공사례를 널리 전파했다.


강봉균 장관의 설명.


“당시 외교부를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의 개발성공 요인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한국에 온 개도국 국회의원이나 관료 들을 대상으로 2-3시간씩 성공사례를 소개했습니다. 1991년에는 중국 정부초청으로 중국에서 국장급 이상 관료들을 대상으로 2일간 경제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오전에는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자유토론을 했는데 그당시 국장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1992년에는 베트남에 가서 역시 경제교육을 했어요. 대단히 자랑스럽고 보람이 컸습니다. ”


그는 원칙과 소신에 충실했다. 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사례하나. 1980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할 무렵, 각부처에서 엘리트를 차출했다. 그는 차출 대상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서슬퍼렇던 시절에 상상못할 일이었다.


두번째 사례. 차관보로 잘 나가던 그는 1993년 5월23일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밀려났다. 차관으로 승진해야 할 그로선 사실상 좌천이었다. 당시 실세였던 박재윤 청와대경제수석(통상산업부장관. 부산대학교총장 역임)과의 정책충돌 때문이었다. 그는 박수석과 호형호제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공적 소신은 사적 인연을 뛰어넘었다.


김영삼 정부시절 박 경제수석이 강차관보에게 ‘신경제 5개년계획안’수립을 주문했다.

그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있는데 무슨 신경제계획인가”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작성지침을 만들어 청와대로 올라갔다. 국장급 비서관들이 보는 앞에서 박수석과 강차관보는 계획안을 놓고 격론을 벌었다. 그 핵심은 금융개혁이었다. 강차관보는 “금융개혁없이는 신경제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경제수석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고 맞섰다. 강차관보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충돌했다.


강봉균 장관의 증언.


“박 수석에게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라. 나는 못하겠다’고 소리치고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한달 동안 그 일을 안했어요.”


한 달여가 지난 어느날 퇴근 무렵, 이경식 부총리(한국은행 총재역임)가 강차관보를 집무실로 불렀다.

“청와대와 상의했는데 강 차관보를 교체할 수 밖에 없어요”


그는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발령이 났다. 청와대의 눈밖에 나면 그만둬야 했지만 그의 능력이 그의 지키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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