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관운(官運)의 여신은 강봉균 에게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1993년 12월1일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실무대표단장으로 활동했다.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됐다.
당시 쌀개방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나 같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후보시절 1992년 11월23일 유세장에서 “쌀은 절대 개방되면 안됩니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은 개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공약한 상태였다.
이 공약은 김영삼 정부의 족쇄가 됐다. 쌀시장 개방은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강 실장이 해결사로 총대를 멨다. 강 실장은 각계전문가 20여명과 밤을 세워 토론하며 안을 만들었다. 강 실장은 11월말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박재윤 경제수석등이 배석한 가운데 쌀시장개방 대책을 보고했다. 한국도 최소시장을 개방하고 개방기간을 최대한 유예하되 국민 수요의 1-4%를 수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 대통령은 강 실장의 보고에 대해 만족감을 나타냈다. 강실장은 제네바로 날아가 실질적인 UR협상을 지휘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강 실장은 그해 12월28일 노동부차관으로 승진했다. 이어 1994년 10월6일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됐다. 3개월여만인 그해 12월26일 다시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관자리만 3번째 였다. 김대통령은 그해 12월23일 정부조직개편에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출범시켰다.
강봉균 장관의 회고.
“ 청와대 지시를 받아 두 부처를 통합하는 작업을 했어요. 작업이 순탄할리 없었어요. 파란곡절을 겪으며 기구와 인력 등을 확정했어요. 출범하는 통합부처 차관은 제가 가는 걸로 청와대에서 언질을 줬고 그래서 실무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사발령이 안나요. ‘이상하다. 이거 무슨 일이 생겼구나’했어요. 12월27일 청와대에서 차관인사 발표를 앞두고 3시간동안 격론이 벌어졌다고 해요. 저의 차관 임명을 놓고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는데 결론은 총리행조실장으로 보내기로 했다는 겁니다.“
정부는 행정조정실장의 위상을 대폭 강화했다. 과거 행정조실장은 차관회의 멤버가 아니었다. 그가 행정조정실장으로 가면서 차관회의 의장을 맡았다. 행정조정실장은 감투가 10개가 넘었다. 그는 정보화추진위원회 실무위원장으로 정보화촉진기본법과 정보화기획실설치, 정보화촉진기본계획 입안 과정에서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면서 정보화 기반을 구축하는데 조정자 역활을 했다.
그는 행정조실장시절 집을 반포에서 총리공관에서 가까운 청운동으로 옮겼다. 그는 아이디어가 넘처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 맡은 일은 줄줄 꿰고 있어 ‘빠꼼이’로도 불렸다. 이수성 총리는 “강실장 같은 공무원이 있는 줄 몰랐다”고 격찬했다.
그는 학구열이 강해 미국 월리암즈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를, 그리고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심없이 소신껏 업무를 합리적으로 추진한 결과는 장관 발탁이었다.
이현덕의 정보통신부<169> (1) | 2012.02.06 |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168> (0) | 2012.01.31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166> (0) | 2012.01.18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165> (0) | 2012.01.09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64> (0) | 2012.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