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눈과 구체적 실행력이 결합할 때 산업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
1980년 9월,
전두환 정부 대통령 과학기술비서관실은 김재익 경제수석(1983년 10월 순직)아래 오명 비서관(체신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 과기 부총리. 건국대 총장 역임, 현 웅진에너지 폴리실리콘 회장. KAIST 이사장), 홍성원 연구관(대통령 과학기술비서관 KAIST서울분원장, 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 정홍식 행정관(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정보기술협회 이사장) 등이 근무했다. 당시 경제수석실은 과학기술, 산업, 자원 등 6개 비서관실로 구성했고 인원은 27명이었다.
오 비서관 아래 홍 연구관은 육사(18기)를 5등으로 졸업했다. 1년간 전방 소대장 근무를 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나 유타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콜로라도대학원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타대학 유학시절 먼저 와 있던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현 숙명학원 이사장 )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회고했다. 귀국 후 육사 교수를 하다가 1980년 국보위 상임위원장 비서실 파견 근무를 했다. 전두환 위원장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런데도 비서실에서 전 위원장 일정 관리를 전담하면서 신임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그는 중령으로 예편, 1980년 10월말부터 청와대에서 연구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정홍식 행정관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3학년 재학 중 행정고시(10회)에 합격, 국무총리실과 청와대 정무수석실을 거쳐 1979년 12월부터 경제수석실에서 근무했다. 전입순으로 따지만 그가 가장 고참이었다.
이들은 환상적인 팀웍크를 자랑하며 한국 정보통신사(史(사))에 이정표가 될 굵직굵직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했다. 이들이 소신껏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는 김재익 경제수석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제수석실의 당시 산업전략은 ‘지원 강화’와 ‘규제 완화’ 두 가지였다.
이런 전략의 첫 가시적 조치가 컬러 TV시판과 컬러 TV방송 허용이었다. 이 조치는 전자산업과 대중 문화산업 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그러나 칼러TV방송 허용까지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시절 소비조장과 국민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컬러 TV방송을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전자업체들은 컬러 TV를 국내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었다.
칼러TV허용 여부를 문제를 놓고 청와대안에서도 찬반 논쟁이 치열했다. 오 비서관은 ‘가전업체의 앞잡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고 컬러TV방송을 강력히 추진했다.
오명 비서관의 증언.
“국내 전자산업이 당면한 문제 해결의 첫 실마리를 컬러TV 방영으로 보았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600달러 정도로 컬러 TV를 생활화하기에 별 무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청와대안에서도 칼러 TV방영 여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나는 김재익 경제수석의 지원을 받으며 허용을 강력히 주장했다. 고맙게도 당시 `실세였던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청와대 정무1수석. 14.15대 국회의원 역임. 현 미래한국재단 이사장)도 우리 주장을 지지했다. 가까스로 컬러TV방영을 허용키로 합의했다. 마침내 그해 11월10일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이 12월1일부터 칼러 TV방송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2월1일 KBS-1TV가 국내 최초로 컬러 방송을 시작했고 KBS-2TV 와 MBC는 12월 22일부터 방송을 개시했다.”(자서전 ‘30년후의 코리아를 꿈꿔라’에서).
첫 컬러TV방송을 하는 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전자제품 대리점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 칼러화면을 신기한듯 지켜봤다. 이날 KBS는 오전 10시30분부터 서울세중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수출의 날’ 기념식을 칼러로 중계했다. 한국에 흑백 TV가 도입된 지 26년 만이며 세계 81번째 컬러 방송이었다. 하지만 미국보다는 29년, 일본에 비해 20년이 늦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에 참석, 치사를 통해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생산성 향상과 기술개발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면서 “성장잠재력을 효율적으로 높이고 국민 의지를 결집하면 우리는 제2의 경제도약을 이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홍식 행정관 회고.
“김재익 경제수석은 일밖에 몰랐습니다. 심지어 김 수석 집에 가도 온통 일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경제수석실은 ‘토론비서실’이었습니다. 김 수석이 워낙 토론을 좋아하고 진행도 잘 하셨습니다. 이슈가 있으면 토론하고 결과는 업무에 반영했습니다. 김 수석이 주재하는 토론회는 비서관과 행정관 등 직급별로 열렸는데 핵심은 항상 ‘왜’ 그리고 ‘어떻게’ 였습니다. ”
컬러TV방송에 이어 경제수석실은 전자공업육성을 위한 장기정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전자산업 육성의지는 박정희 대통령도 강력했다. 박 대통령은 1966년 12월15일 전자산업진흥 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체계적인 전자산업 진흥을 위해 ‘전자산업의 대부’로 불리는 김완희 미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장. 전자신문 창간 발행인 역임. 작고)를 1997년 9월4일 초청했다. 김 박사는 국내 업체와 연구소 등을 돌아보고 9월16일 ‘전자산업 진흥을 위한 건의서’를 박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박 대통령은 이자리에서 김 박사에게 “구체적인 전자산업 진흥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 박사는 8개월여의 작업끝에 1968년 5월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최초의 전자산업 미래비전이었다.
이현덕의 정보통신부<235> 41살의 체신부 차관 오명 (0) | 2013.01.17 |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234>-전자공업육성계획 (0) | 2013.01.08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김재익과 오명의 만남 (0) | 2012.12.11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231>-전두환의 경제 제갈량 (0) | 2012.11.29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230>-전두환의 리더십 (0) | 2012.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