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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2일 "강원도로 떠난 가족여행"<상>

여행. 맛집. 일상

by 문성 2014. 8. 1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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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여름휴가야?"

1년이 너무 빠르다. 이 세상에서 가는 세월을 그 누가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농담삼아 "나이와 가는 세월은 비례한다"더니 그 말이 실감난다. 나이 60이면 세월 가는 게 시속 60Km라는 것이다.  그럼 나이 50이면?. 시속 50km이다.

 

1년 전 이맘 때 여름휴가 때 가족이 백제문화권을 돌아 본 적이 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 휴가철을 맞았다.  이번에도 가족 여행은 큰 아들이 바람을 잡아 주도했다.

아내는 두 아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대찬성이다.  일처리가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 더욱이 여행은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늘 상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다가 낯선 지역과 만나 세상을 새롭게 관조해 볼 수 있다. 여행은 삶의 청량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누가 여행가자고 하면 뒤로 뺄 일이 아니다.

 

큰 아들이 당초 신라 문화권인 경주답사를 희망했으나 교통편과 일정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그러다가 과거 옆집에 살던 현진이네가 강원도 양양에서 팬션을 운영하는데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게 발단이 돼 여름휴가 절정기인 7일과 812일 일정으로 강원도 인제와 속초, 양양 등지를 다녀왔다.

 

나는 집에서 혼자 쉬고 싶었다. 이상하게 최근 무기력증에 시달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두 아들 등살에 떠밀려 7일 12시경 집을 출발했다.  버티다가 막판에 떠밀리다시피 해 차에 올랐다. 막상 출발하니 기분이 상쾌했다. 납치 휴가라고 할까.

이런 점을 잘 아는 아내는 늘 "어디 가자면 늘상 싫다고 하다가 막상 출발하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며 핀잔을 준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걸 어떻게 하나. 처음부터 기분좋게 출발하면 어디 덧나나. 내가 고쳐야 할 점이다.

 

이번 여행은 가족 여행중 제일 편했다. 모든 일정을 큰 아이가 다 결정했다. 잠자는 곳만 현진이네 팬션으로 정했다. 나머지는 마치 운수행각하듯 가고싶은 대로 갔다. 차도 아들 차를 가지고 갔다. 내 차는 사람으로 치면 노령(老齡)인데다 수동(手動)이다. 만에 하나 중간에 고장이라도 나면 낭패였다. 그래서 둘째 차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소형이지만 구입한지 얼마 안된 새 차였다.  

 

운전을 두 아들이 번갈아 가면서 했다. 날씨도 운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햇볕대신 엷은 구름이 끼어 살갖이 검게 탈 염려가 없었다.  아내와 나는 편히 앉아 차창밖의 푸르고 상큼한 우리의 산천경계를 두루 구경했다.  먹는 것도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찾아 그곳에 가서 먹었다.

 

여행 준비를 한 후 남양주를 출발해 일단 춘천으로 갔다. 그곳에서 춘천원조숯불닭갈비와 막국수로 점심을 먹었다음식점 찾느라 다소 헤멨지만 요즘은 네비게이션이 있어 고생은 별로 하지 않았다. 소문난 집 음식맛이 우리가 맛보더 음식점과는 달랐다. 닭갈비 맛이 소고기 못지 않았다. 식감이 아주 부드러웠다. 막국수도 서울에서 먹던 맛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났다. 재료에서 차이가 나는듯 했다. 음식맛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아내가 음식맛을 칭찬하는 것을 보니 소문 난 집이 확실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한 목적지는  설악산 백담사.

춘천에서 홍천- 인제- 원통을 지났다. 과거 내가 군대 생활할 무렵에는 인제나 원통이 산골오지여서 이제 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자조적인 말이 유행했다배경 있고 돈 있는 사람은 후방으로 가고 힘없고 배경없는 사람은 전방에 배치된다는 반어적 신세타령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로가 잘 설치돼 그야말로 고속으로 달렸다. 영동고속도로는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는데 이곳은 거칠 게 없었다.

 

백담사는 20여전년 아내와 둘이 다녀간 적이 있었다. 당시 5공 청산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뒤였다. 북면 용대리 버스터미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로 갔었다.

 

그런데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자동차를 용대 주차장에 세워놓고 표를 끊어 백담사로 향했다. 거의 5분 간격으로 차가 떠났다. 원래는 30분 간격인데 휴가철이라 사람들이 몰렸다. 사람이 다 차면 무조건 출발했다. 운행표를 보니 첫 차는 오전 7시, 막차가 오후 6시 였다. 백담사에서 마지막 출발하는 시간은 오후 7시였다. 만약 차를 놓치면 걸어서 내려와야 했다.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는 8Km. 시간은 15분여 걸렸다. 길이 좁아 외부 차량은 통행을 금지했다. 셔틀버스도 서로 만나면 길이 넓은 곳에서 기다렸다. 운전사들이 서로 무전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백담사는 서기 647년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를 창건했으나 이후 백담사로 개칭했다. 전설에 따르면 살악산 대청봉에서 작은 담이 100개 되는 지점에 절을 지어 그렇게 변경했다고 한다.

 

20년 전의 백담사는 볼 품이 없었다. 절까지 가는 다리도 없어 돌다리를 건넜다. 이번에 보니 면모가 확 달라졌다.

 

백담사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관관지로 유명하다.

 

 

하나는 만해 한용윤 스님(사진)이다.

백담사는 스님의 출가 절이다. 스님은 이곳에서 머리를 깍았다. 그 유명한 님의 침묵도 이곳에서 발표했다.

 

"님은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재치고 단풍나무숲을향하야ㅣ1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떨치고 갓슴니다.

황금의 꽃가티 곱고빗나든 옛맹서는 차듸찬희꼴이되야서 한숨의미풍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 키스 의추억은 나의운명의지침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운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머럿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슲음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업는 눈물의원천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 아는까딹에 것잡을수업는 슲음의힘을 옴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것과가티 떠날때에에 다시맛날것을 밋슴니다.
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침묵을 휩싸고돔니다."

 

 

 

 만해 스님은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이곳에는 만해 기념관이 있다. 그곳에는 만해 스님에 관한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백담사에 온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곳을 돌아봤다

 

 

 

 

다른 하나는 백담사 극락보전(사진) 왼쪽에 있는 화엄실이다. 요사채다.

이곳이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여사와 현대판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요사채 마루에 당시 사진을 몇 개 세워 놓았다. 전 전 대통령이 스님들과 농사일을 하는 모습과 붓글씨로 사경하는 사진(아래 )이었다.염주를 목에 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방안 횟대에 옷을 걸어 놓은 모습도 그대로 재현했다. 마치 60년대 시골 풍경과 같았다. 

불가에서 자신의 죄업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말한다. 당시 그의 형제는 모두 감방에 가 제사 지낼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만큼 그 시대, 그를 향한 국민의 울분은 대단했다.

일부 관광객은  화엄실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기도 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력무상(權力無相)의 산 증인이라면 바로 전 전대통령일 게다. 그만큼 영욕의 세월을 경함한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백담사 유배 후 문민정부 시절 다시 감옥살이를 했다.

 

죄업에 외상은 없다. 죗값은 받드시 치른다. 이게 불가의 가르침이다. 이런데도 아직도 정치권이나 권력을 가진 권력층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양인 듯 제 멋대로 설치는 이가 다수다. 아직도 꿈속을 헤메는 정신 못차린 사람이다

 

백담사 계속은 절경이었다. 곳곳에 작은 폭포들이 물보라를 잉태했다. 맑은 물과 바위. 나도 훌러덩 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 들고 싶었다. 속세의 온갖 잡념을 그곳에 씻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이 계속을 통제하지 않았다면 이곳은 인간의 손때를 타서 그야말로 오염되고 자연은 망가졌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건드리지말고 그대로 뇌둘 때 보호된다는 점을 새삼 절감했다.

 

큰 아들이 말했다.

자연은 그대로 뇌 두는게 보호하는 겁니다.” 맞는 말이다. 대견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5시경 그곳을 나와 미시령을 넘었다.

해발 826m라고 한. 울산바위(사진)가 위용을 자랑하며 우리를 내려다 봤다. 미시령을 넘어 속초시 노학동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째가 맛집을 찾았다.

미가(味家). 황태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시간이 남아 옆에 있는 한옥마을을 구경했다.  마을 뒤에서 설악산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속초에서 양양을 향해 달리는 해안도로는 통행이 원활했다. 출렁이는 파란 동해 바다를 보며 달리는 기분은 상쾌했다.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즐거운 것, 바로 여행의 묘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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