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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06>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1. 5. 2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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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상용화는 새 이동통신시대를 여는 ‘미래의 창’이었다.


6년여의 긴 여정에 기술자립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려는 장애물과 이해집단간의 갈등이 많았지만 기술자립의 열정과 의지는 막을 수 없었다.


CDMA첫 상용화라는 ‘대하 드라마’에는 등장 인물들이 많다. 그들 중 조연(助演)은 없다. 그 역할이 크던 작건 모두 CDMA상용화를 위한 기술도입과 개발, 정책 등에 모두 주연(主演)이었다.


1989년 1월 26일.

최영철 체신부장관(통일부총리 역임. 현 서경대학교 총장)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새해업무보고를 통해 통신기술고도화와 대북방통신교류 등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개발중인 TDX-10의 실용시험을 연내에 마무리짓고 93년까지 대량 공급하겠다고 보고했다.


체신부는 이에 따라 낙후된 이동통기술을 끌어올리기 위해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개발을 국책과제로 선정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1988년부터 디지털 무선통신시스템 개발과제를 추진하고 있었다.


체신부는 날로 폭증하는 국내 이동전화 수요를 최대한 충족시키고 이동통신기술을 하루 빨리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소가 추진중인 과제를 확대 개편한 것이었다.

개발과제가 확대개편됨에 따라 연구개발 목표도 기지국과 단말기 개발에서 이동통신교환기까지 포함하는 전체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를 주관한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의 표준규격을 제정하기 위해 각국의 방식을 연구했다.
처음 미국표준인 TDMA방식을 근간으로 개발을 진행했지만 기반기술이 없는 상태에서 자체개발의 성과를 낼수 없없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자체개발을 포기하고 외국업체와 공동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AT&T와 모토로라 등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당시로선 생소한 CDMA이동통신기술이 등장한 것이다. CDMA도입의 물꼬를 튼 사람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이원웅 무선통신개발단장(인천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역임)이었다.


1990년 11월초.

미국 모토로라사에 TDMA 방식에 관해 공동기술개발 협의차 출장 갔던 이원웅 단장은 반대급부를 보장해 달라는 모토로라 측의 요구에 별 성과없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 단장은 뉴욕에서 나이넥스사에 근무하던 오태원 박사(현 고려대 컴퓨터통신공학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박사 잘 지내요”

“이 단장님 웬일이세요. 뵙고 싶은데 시간을 내 주세요.”

오 박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이 단장아래서 근무하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오 박사는 당시 퀄컴사의 이동통신분야의 기술시험을 주관했다고 한다. 나이넥스사를 찾은 이 단장에게 오 박사는 연구소를 소개하고 이어 신기술 몇 가지를 소개했다.

그 중 하나가 퀄컴이 필트테스트에 성공했다는 CDMA방식의 이동통신기술이었다.


비디오를 통해 그 기술을 본 이 단장이 물었다.

“퀄컴이란 회사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누가 사장이요?”

“어원 제이곱스와 앤드류 비터비가 세운 벤처회사가 바로 퀄컴입니다. 그들이 개발한 기술입니다.”


이 단장은 순간 “이 정도라면 70점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퀄컴사 경영진인 두 사람은 통신공학의 대가로 세계적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아폴로프로젝트를 위해 링커비트라는 벤처회사를 설립해 통신장비를 공급했고 이어 퀄컴사를 만들어 CDMA를 이동통신에 적용하는 기술방식을 연구한 것이었다.


이 단장의 회고.

“세계적인 통신권위자들이 개발한 기술이어서 처음인데도 순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사용이어서 그 기술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고 자료도 충분하기 않았지만 미래 전망은 밝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에 돌아 온 그는 CDMA방식의 이동통신기술에 관해 경상현 소장(한국전산원장. 체신부차관. 정통부 장관 역임. 현 KAIST겸직교수)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경소장은 이 단장이 미국출장 무렵, 미 팩텔사의 한국지사장인 박헌서박사(현 한국정보통신 회장)를 통해 CDMA방식에 관해 이미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박 사장은 코넬대 정보통신공학 박사로 경소장이 1976년 말 전자교환기 도입기종의 총괄 책임을 맡았을 때 생산반 책임자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그가 대전으로 내려와 CDMA기술을 소개한 것이었다. 당시 미 팩텔사는 퀄컴사에 투자를 했던 것이다.


경 전 장관의 회고.

“당시로선 생소한 기술이었습니다. 박 사장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CDMA방식이 장래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차에 이 단장이 귀국해 CDMA방식의 기술을 보고했습니다. 그렇다면 퀄컴사를 직접 방문해 실태를 파악해 보자고 해서 다시 출장을 보냈지요.”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이혁재 부장 등 연구원들도 이 무렵, 팩텔의 월리암 리 기술부사장을 초정해 TDMA기술 강연을 들었다. 그 자리에 퀄컴 엘런 살머시 부사장이 함께 나타났다.


이 혁재 부장의 설명.

“당시 외국의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자주 들었어요. 그런데 월리암 리가 CDMA방식의 우수성을 강조했어요. 그는 통신분야의 대가였습니다. 이 때 퀄컴의 경영진이 통신공학계의 태두인 제이콥스와 비터비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 단장은 퀄컴사에 관한 내용을 파악하고 퀄컴사와 사전조율을 거쳐 1991년 1월 16일 미국방문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 박 사장이 퀄컴측과 일정 조정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 무렵, 걸프전이 치열했다. 1월16일 발발한 걸프전은 미국을 주축으로 다국적군이 이라크와 퀘이트내 목표물에 대한 공중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단장의 말.

“그날 오후 미국으로 갈려고 하니까 주위에서 전쟁이 한창인데 그곳으로 왜 가느냐고 말렸어요. 당시 미 해군본부가 퀄컴사가 있는 샌디애고에 있었거든요.”

이 단장은 출장길에 김광호 연구소 사업개발실장과 동행했다. 이 단장은 퀄컴사의 경영실태를 파악한 상태였다. 기술은 퀄컴사가 보유했지만 협상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단장은 퀄컴사에서 도착한 다음날인 1월18일 퀄컴사와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퀄컴사에서는 어원 제이곱스회장이, 그리고 한국측을 대표해 이 단장이 각각 서명했다.

“양해각서는 서로 손잡고 잘해보자며 맺는 것이어서 부담은 크지 않았습니다. ”


당시 CDMA방식의 처지는 처량했다. 나름대로 최신기술이라고 개발은 해 놨지만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도 TDMA가 표준이어서 CDMA방식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CDMA방식에 한국이 다가가 공동개발의 손을 내민 것이다. 그 손은 훗날 황금의 손이 됐다. 기적의 ‘대하드라마’는 이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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