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단은 1992년 12월24일 사용자 요구사항을 만들었다.
ETRI와 개발업체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공청회를 열어 기준을 마련했다. 시험절차서도 만들었다.
199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지만 서정욱 단장(사진. 과기부장관 역임)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1993년 12월 31일과 1994년 1월1일은 1년 차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에 쫓기는 그룹입니다. 가족들에게 못할 짓이지만 오늘 일을 다 마치고 집에 갑시다."
새해를 맞아 1994년 1월5일.
관리단은 사용자 요구사항을 확정, 발표했다. 관리단이 요구하는 기준대로 업체가 제품을 만들면 우선 구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구매자인 한국이동통신은 ‘갑’이 되고 개발업체는 ‘을’로로 관계가 명확해 졌다.
이성재 부장의 말.
“사용자 요구사항에 이어 시험절차서를 만들라고 지시했더니 직원들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제품도 안나왔는데 무슨 시험절차서냐는 것입니다. 15일간 날밤을 세워 800여개 항목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각 업체 담당자들의 의견을 들어 1024개 항목을 4개월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관리단은 그해 3월25월 각 업체의 제품에 대해 예비시험과 상용시험 계획표를 각 업체로 보냈다. 이 계획에 따라 예비시험을 실시한 결과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LG정보통신 순으로 통과했다. 이들 업체는 계속 제품 시험을 했다.
그해 7월7일 한국이동통신의 경영권이 선경그룹(현 SK그룹)으로 넘어갔다.
그해 11월18일 한국이동통신 중앙연구소에서 윤동윤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CDMA시스템과 아날로그 시스템, 유선전화 (PSTN)사이의 상호통화에 성공했다.
1995년 1월부터 각 업체별 상용시험을 시작했다. 상용시험에서는 LG정보통신이 108개 항목에 걸친 시스템 상용시험에 첫번째로 통과했다. 2월에 삼성전자, 그리고 3월에 현대전자순으로 시험에 통과했다.
95년 3월 서 단장이 한국이동통신 사장으로 취임했다.
서 사장은 사장직할로 한국이동통신 연구소 인력을 디지털사업본부로 개편해 이성재 부장을 본부장으로 발령냈다. 본부 인력은 120명이었다.
그해 5월부터 서울 등 수도권 전역에서 시범운용을 시작했다. 관리단은 눈코뜰새없이 뛰어 다녔다. 미국 출장도 무박3일이나 1박4일로 다녀와야 했다. 그해 5월8일 LG정보통신이 가장 먼저 933개 항목을 통과해 1차 수도권지역 제품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그해 6월12월부터 17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 95정보통신전시관에서 CDMA이동전화 시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경상현 정통부 장관 등이 참석해 시험통화를 했다. 서 사장은 시연회 전날 밤 관련 인력을 총동원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서 사장은 12일 아침 광화문 정통부에서 코엑스(KOEX)까지 이동하는 기자단 버스안에서 CDMA 시연회를 개최했다. 서 사장과 기자단과의 통화는 목적지인 전시장까지 이동하는 내내 계속됐다 통화품질도 기존 이동통신 기술보다 더 선명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1995년 연말이 다가오자 한국이동통신 내부에서 서비스 시기 연기론이 나왔다. 마케팅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성재 본부장은 전국에서 300명을 차출해 CDMA단말기를 주고 인천과 부평 등지에서 1주일간 매일 100통화를 해 그 결과를 제출하도록 했다. 통화는 무제한이었다.
이 본부장의 말.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관련자료를 마케팅본부장에게 통계를 집계하도록 했어요. 결과는 아날로그보다 100배는 낫다고 했어요..”
그 무렵 , 조정남 부문장(SKT사장. 부회장 역임. 현 고문)이 이 본부장에게 물었다.
“ 이거 제대로 될까?”
이 본부장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됩니다. 안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상용서비스를 며칠 앞두고 기지국과 단말기 소프트웨어에서 결함이 나타났다. 서 사장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밤새워 문제점을 찾고 있는데도 퀄컴 단말기에서 버그가 발생했다. 마침 퀄컴기술진들이 홍콩을 거쳐 한국에 왔다. 서 사장은 그들에게 “당신들을 인질로 잡겠다. 가족들에게 전화는 할 수 있다”며 전화기를 건네 주었다. 그들은 성탄절을 서울에서 보내며 문제를 해결했다.
그해 12월31일 최종 상용화 시험을 했다. 서울에는 주파수를 배정받지 못해 기지국 30개를 설치한 인천지역으로 갔다. 손길승 부회장(현 SKT명예회장)과 조정남 부문장 등이 CDMA 통화상태를 놓고 내기를 했다. 통화가 계속되면 조 부문장이 이기고 끊기면 지는 것이었다.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 그러자 손 사장이 차를 골목길로 몰아 계속 빙빙 돌았다.
조 부문장이 말했다.
“그만 돌고 이제 갑시다”
통화가 끊기지 않아 조 부문장이 이긴 것이다.
손 부회장이 지갑에서 돈을 일부만 꺼내는 것을 조 부문장이 지갑채로 빼앗았다. 지갑안에 2백60만원이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고생한 현장 직원과 관리단에 선물을 사서 돌렸다.
CDMA첫 상용화는 한국ICT산업의 위상과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1월3일부터 상용서비스를 시작했다. 신세기통신도 4월1일부터 상용서비스에 돌입했다. CDMA첫 상용화로 가는 길에 관리단과 연구진간 애증의 갈등도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은 ICT강국으로 가기 위한 성장통(成長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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