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는 캄캄했다. 암흑, 그 자체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트웨어(SW)기업인 한글과컴퓨터(한컴)가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경영 악화로 자금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한컴은 1998년 5월 13일 1차 부도를 냈다. 풍전등화의 처지였다. 이때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가 투자자로 등장했다. 조건이 있었다. 워드프로세서 `한글`의 개발 중단이었다. 한글 SW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국민이 한글 지킴이로 나섰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한글 살리기 운동이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998년 6월 15일 오전 11시.
서울 롯데호텔에서 이찬진 한컴 사장(15대 국회의원 역임, 현 드림위즈 대표)과 김재민 한국MS 사장(더존디지털웨어 대표 역임)이 긴급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사장의 표정은 무겁고 어두웠다. 회견장은 100여명의 기자로 꽉 들어찼다.
두 사람은 MS가 한컴에 1000만~2000만달러(당시 환율기준 약 130억~260억원)를 투자하고 MS는 한컴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한컴은 MS 투자를 받는 대가로 한글 개발을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한글 포기선언이었다.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MS에 맞서 한국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지켜왔다. 이 발표는 국내 SW 업계와 사용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한글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경쟁했던 두 회사의 합의는 `적과의 동침`이나 같았다.
이찬진 사장은 이 자리에서 “그동안 해마다 30억~50억원의 개발비를 투자해 신제품을 개발했지만 총체적인 경제위기와 불법복제로 인한 경영난으로 더 이상 사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투자 유치를 하게 됐다”고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이 사장은 “한컴은 앞으로 보다 경제성 있는 수익사업을 시작하고 특히 인터넷 콘텐츠 사업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민 사장은 “그동안 국내 기업과의 다양한 협력관계를 위해 노력해 왔다. MS는 한국 선두 IT기업인 한컴과 협력해 한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투자규모에 대해 “한컴의 경영 정상화 비용을 대략 산출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1000만∼2000만달러 선으로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찬진 전 사장의 증언.
“그동안 삼성과 대우 등 대기업과 접촉했지만 투자유치에 실패했어요. 그러던 차에 MS가 투자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한컴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2000만달러면 경영 정상화가 가능했습니다. 매디슨조차 처음에는 투자를 거절했어요.”
회견장에서 기자들과 두 사람 간 일문일답이 이어졌다.
-한컴은 한국 SW산업의 대표 업체고 회사 주력제품인 한글은 MS도 넘보지 못할 만큼 한국 시장에서 아성을 쌓았는데 사업을 포기하게 된 배경은.
▲이찬진 사장=해마다 30억~50억원의 자금을 투자하면서 신제품을 개발했지만 SW 불법복제가 워낙 심해 수익성이 좋지 않았다. 올해 공공부문의 워드프로세서 시장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경기침체로 수요가 크게 줄어 자금 압박에 시달렸다.
-한컴과 MS는 치열한 경쟁관계인데 사업 파트너가 된 이유는.
▲이찬진 사장=국내외 많은 업체와 접촉했으나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기업은 MS 이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자금을 지원받게 됐다.
▲김재민 사장=MS는 더 많은 동반자를 확보하기 위해 한컴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컴 경영에 직접 참여할 계획은 없다.
-자본투자 방식은.
▲이찬진 사장=신주발행을 통한 증자 형식이다. 한컴 자본금(39억원)보다 많은 금액을 지원받지만 우선주 형식이나 의결권 위임 등을 모색해 최대주주는 바뀌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앞으로의 사업계획은.
▲이찬진 사장=인터넷 콘텐츠 분야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할 계획이다. 한글 개발은 중단하겠다.
▲김재민 사장=한글에서 MS워드로 제품을 교체하는 사용자들을 위해 별도의 SW를 개발할 계획이다. 세부 내용은 나중에 공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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