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배순훈 정통부 장관은 1998년 12월 17일 오후 무거운 표정으로 김중권 대통령비서실장(새천년민주당 대표 역임, 현 변호사)을 만났다. 표정이 심각하기는 김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김 실장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말문을 열었다.
배 장관은 조찬강연 내용을 설명한 후 “빅딜에 관해 반대한 적이 없다. 다만 기업의 부채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진의가 잘못 전해졌다”고 해명했다.
배 장관의 증언을 토대로 그날 대화를 재구성해 본다.
“사태가 어렵게 돼 걱정스럽습니다.”
“사표를 내라는 것입니까.”
“상황을 좀 더 두고 보시죠. 그러나 일단 사표를 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배 장관은 김 실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김 실장도 “그날 배 장관이 내방으로 와서 사표를 냈다”고 확인했다.
배 장관의 사표는 곧장 수리됐다.
청와대는 18일 배 장관의 경질을 공식 발표했다.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대통령비서실장, 문광부 장관 역임, 현 국회의원)은 “후임은 법 절차에 따라 총리의 제청을 받아 임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대기업 빅딜 파문의 조기진화와 다른 각료들에 경고의 의미로 배 장관의 경질을 결정했다고 한다.
탱크주의 장관으로 국민에게 인기가 높았고 김대중 대통령이 파격적으로 발탁했던 대기업 CEO 출신 배 장관은 그렇게 물러났다. 그는 재임 10개월 동안 거침없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취임 초 “경쟁력 없는 기업은 망해야 국가 경쟁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교육 시 “기업에서 절대 돈 받지마라. 돈 필요하면 장관에게 말해라. 내가 구해주겠다”고 강조했다.
배 장관은 초고속통신망 구축에 역점을 두었다. 김 대통령도 초고속통신망 구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배 장관 그거 왜 깔아야 합니까.”
“목포 사는 고교 3년생이 서울 강남에 있는 고교의 수업을 받으려면 이걸 깔아야 합니다. 전북 정읍 최 씨 할머니가 손수 가꾼 유기농을 서울 부자에게 직접 팔 수도 있습니다.”
배 장관의 증언.
“초고속통신망 구축사업에 당시 정통부 과장이던 형태근씨(방통위 상임위원 역임, 현 동양대 석좌교수)와 신용섭씨(방통위 상임위원 역임, 현 EBS 사장)가 주말 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습니다.”
당시 정통부는 부처 평가에서도 1위에 올랐다. 특히 만년 적자를 보던 우편사업에 민간 경영기법을 도입해 115년 만에 우정사업을 흑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배 장관의 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기업과 달리 행정부에서는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 간 협의다 국회 통과다 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특히 국회와는 늘 갈등 관계였습니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곧장 해외로 떠났다. 모르코에서 쉬면서 사하라사막으로 갔다. 그런데 사막으로 휴대폰이 걸려 왔다. 사막에서 휴대폰이 터지다니 놀라웠다. 전화는 미국 투자기업인 왈리드 앨로마 어소시에이츠 대표인 앨로마라였다.
배 장관의 말.
“이 사람이 `대우전자 인수에 관심이 많다. 우리는 돈밖에 없는 투자자들이고 회사를 인수하면 누군가가 경영을 맡아줘야 하는데 회사를 나스닥에 상장할 테니 당신이 경영을 해달라`는 겁니다. 잘못하다간 오해를 살 것 같아서 구체적인 투자규모와 상장일정 등을 제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한국 장관 출신이니 이 사업은 한국 국익에 도움이 돼야 하고, 또 내가 대우 출신이니 김우중 회장에게도 도움이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왈리드 앨로마 측은 대우전자에 32억달러를 투자해 2년간 회사를 개편한 뒤 1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세계 최대의 가전업체로 키운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배 장관은 이런 조건이라면 국가나 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 장관의 이어지는 증언.
“연봉도 많이 주겠다는 겁니다. 3억달러를 제시하더군요. 김우중 회장에게 이런 내용을 알렸고 양측은 1999년 7월 MOU까지 교환했습니다. 이헌재 당시 금감원장(부총리 역임, 현 코레이 고문)이 만나자고 하더니 `형님 해외 매각이 잘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김 회장이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배 장관 경질 후 김대중정부는 대기업 빅딜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한 대기업 빅딜은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가 시장에 개입하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현덕의 정보통신부<320>-남궁 석 정통부 장관 (0) | 2014.09.18 |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319> "정부에서 일할 생각 없습니까" (0) | 2014.09.10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317>-배순훈 장관의 '대기업 빅딜 발언 파문' (0) | 2014.09.01 |
이헌재 "정부 주도의 기업 빅딜은 실패" (0) | 2014.08.28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315> LG, 아서디리틀 평가보고서 반박 (0) | 2014.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