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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힌 월정사 추억

사찰기행

by 문성 2009. 12. 17.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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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과 호남 서해안에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지역에 눈 피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어릴 적 부터 유난히 눈이 좋았다. 시골에 살 때도 눈이 내리면 강아지와 밖으로 나가 뛰어놀다가 부모님 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하얀 눈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지고 잡념이 사라진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문득 10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설경속 적막한 산사, 월정사 추억이다.  2000년 2월 초순 경이었다.

아내와 설악산에 갔다가 오던 길이었다. 휴가였는지 아니면 연휴였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내친 김에 월정사에 들리기로 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오다 진부IC로 빠져 월정사로 향했다.

폭설이 내려 산천은 하얀 솜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오대산 줄기도 하얀 옷을 입었다. 도로 양 옆에는 한 자 가량의 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꽁꽁 얼어 붙은 빙판길을 느릿 느릿 거북이 운전을 했다.

 월정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오대산의 칼바람이 볼에 와 부딪쳤다.



월정사에 들어서니 그 곳이 바로 극락이었다. 추함도 더러움도 없는 텅 빈 순백의 세상이었다. 세상을 공평하게 하나로 만든 하얀 눈만 가득했다. 그 곳에는 부귀도 남녀의 차별이 없었다. 그저 이승을 벗어난 듯한 편안함과 포근함이 있었다.  

월정사 마당은 스님들이 다니는 길만 눈을 가래로 밀어 마치 가르마 같았다. 

간혹 부는 바람에 햐안 눈발이 은모래처럼 날렸다. 청아한 풍경소리만 “댕그랑 댕그량‘하며 우리를 반겼다.  하얀 세상, 티없이 맑은 세상 풍경에 내 자신도 청정해 지는 느낌이었다.
 나와 아내만 그 넓고, 텅 빈 하얀 산사 마당의 주인이었다.  (사진-월정사 홈페이지)


대웅전에 들어서자  부처님과 중년 보살 한 분이 법당을 지키고 있었다.

방석을 내려 놓고 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부처님의 미소가 자애롭다.  보살이 우리를 보더니 전기난로를 켜면서 “추운데 몸을 좀 녹이라”고 권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전기난로를 왜 끄고 있느냐”고 했더니 주지 스님이 근검절약을 강조해 “신도가 와야 전기난로를 켠다“고 했다. 


인연이 있어 월정사에 왔으니 주지 스님께 인사도 드리고 차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싶었다.

보살한테 주지 스님 방 위치를 물어 그 곳으로 내려갔다.

주지 스님 방 앞에서 인기척을 내며 말했다.

“스님”

그러자 안에서 젊은 시자스님이 나왔다.
“누구신지요”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더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들어 오시죠”라고 말해 안내를 받아 방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주지 스님은 현해 스님(사진)이었다. 단아한 모습에 안광이 빛났다. 방안은 냉기로 썰렁했다. 넓은 방은 책들로 가득차 있었다. 옆에 난이 몇 그루 놓여 있었다.

“이 추운 날, 이 산사까지 어떻게 오셨나요”

그날 스님은 잘 다린 대추차를 내주셨다.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내도 그 날 마신 “대추차 맛이 최고였다”고 말한다.
 달면서도 진하고 구수해 대추차를 마시고 나니 얼었던 몸이 확 풀렸다. 시퍼렇게 굳었던 볼이 볼그레하게 변했다.


현해 스님은 월정사에서 출가해 일본 고마자와 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와세다대에서 동양철학과 천태학을 공부하신 학승이었다.
귀국해 동국대에서 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다 월정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었다.

스님은 그 날  나에게 ‘법화경 요품강의(法華經 要品講義)’란 책을 한 권 주셨다. 스님이 평생 강의하고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책이었다.
쉬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사양하고 서울로 향하는 우리를 향해 스님은 신신당부 하셨다.

“천천히 안전 운전하세요”

 그 일이 있은 후 스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
주지 소임을 끝내고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한 후 현재는 월장사 회주로 계신다는 것만 지면을 통해 알 정도다.


세월이 물처럼 흘러도 동화 속 설국 같았던 월정사 모습과 스님과의 만남, 대추차의 맛은  천리향의 은은한 향기처럼 내 마음속에 고이 남아 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설경속에서 마음의 잡념을 청정함으로 헹구게 했던 고요한 산사에 대한 추억이 그립다.  
티없이 깨끗했던 공간, 마음을 텅비게 했던 눈 덮힌 산사에서 또 다른 인연의 재회를 기대하면서 세월의 무상함과 추억의 소중함을  거듭 깨닫는다.  
아, 그 때가 그립다. 눈 덮힌 적막한 산사에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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