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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54>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0. 11. 1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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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1994년 4월 14일 이 총리주재의 1차 추진위가 열려 현안을 결정했다.

이회창 국무 총리는 이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차 회의 내용에 대해 관계자로 하여금 다시 설명하게 하기도 했다.  



윤 장관의 계속되는 회고.

“어느 날 이 총리가 총리실로 오라는 연락을 했어요. 갔더니 김철수 상공. 이종훈 한국전력사장이 와 있어요. 상공부가 한전망을 통신망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총리가 ‘윤 장관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통신이나 한전은 국영기업체다. 각각 법에 따라 업무가 다르다. 한전망을 통신망으로 사용하겠다면 통신도 전기사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법대로 하자’고 했더니 이 총리가 가만히 듣고 있더니 결론을 내립디다.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하더군요”


체신부 고위관계자인 A씨는 “그 당시 윤장관의 추진력과 인적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체신부안에 기획단 발족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장관은 1994년 5월6일 오전 체신부 회의실에서 한.일 체신장관회담을 열고 한.일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 정책협의회를 구성키로 합의했다. 윤 장관은 히카사 가쓰유키 일본우정장관과 회담후 공동발표문을 통해 “정보통신은 21세기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기반구조로 한.일 양국은 정보통신기반구조화에 서로 협력키로 했다”고 밝혔다.


두 나라는 가능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에 관한 세미나를 교대로 개최하고 상호 인력파견도 추진키로 했다.


초대 기획단장은 박성득 체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이 겸임했다. 정통부 출범 후에는 정홍식 정보통신정책 실장이 기획단장으로 맡았다. 두 사람은 통합의 리더십으로 기획단을 이끌었다. 부단장은 천조운 국장이 계속 맡았다. 1996년 6월 기획단은 정통부가 정보화를 담당할 정보화기획실를 설치함에 따라 정보화를 업무를 기획실로 넘긴다.(이 과정은 나중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기획단에는 7개 부처와 산하기관 등에서 파견을 나왔다. 이들은 휴일도 반납했다. 구축단 고단한 업무로 몸져 누원 직원도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역사의 변혁에 매진했다. 이들 외에 체신부 인력도 필요에 따라 불러 일을 시켰다. 이런 노력이 감동적인 초고속망드라마를 연출하게 만들었다.


당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과 관련해 기획단장과 부단장 등은 청와대와 국무총리실과 경제기획원 등에 업무 협의를 위해 뛰어 다녔다. 한이헌 대통령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장)과 추준석 경제비서관(중소기업청장 역임.현 동아대 석좌교수)은 이 사업을 적극 지원해 주었다.


국무총리실 강봉균 행정조정실장(정통부장관 역임. 청와대경제수석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과 경제기획원 이석채 차관(정통부장관. 청와대경제수석역임. 현 KT회장) 등과도 업무 협의를 하러 다녔다.


사람 일이란 알 수없는 법.
95년 12월 개각에서 이석채 경제기획원 차관이 정통부장관으로 발령이 났다. 나중에 이 장관이 대통령 경제수석으로 발령나자 후임으로 1996년 8월 강실장도 정통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노준형 기획총괄반장(정통부 장관역임. 현 서울과학기술대 총장)의 기억.

“ 제가 단장을 수행하고 가서 업무 보고를 하곤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들이 차례로 정통부 장관으로 발탁이 됐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요.”


1999년 7월5일.

일간 신문마다 정보통신부 천조운 이사관의 부음 소식이 실렸다.

1953년생. 대학 3년 재학중 73년 행시 14회 합격해 당시 최연소 합격자의 기록을 남겼다. 체신부 장관비서관. 총무과장. 통신기획과장. 기획단부단장. 정보화기반심의관.(96년 7월) 전파방송관리국장(96년 12월) 중앙전파관리소장(97년 8월15일)을 거쳐 99년 7월4일 별세했다. 병명은 간암.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강건한 체질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가 한창 일할 나이에 타계한 것은 감사원 감사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단에서 실무를 총괄한 그는 감사에서 각종 의혹에 대해 총대를 메고 해명하다시피 했다. 그 심적 부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감사원은 96년 7월 5일 정통부에 대한 감사에서 국책사업으로 추진중인 초고속국가정보통신망 사업에서 과장발표와 370억원의 예산 과다계상 등 중대한 과실이 적발됐다고 발표했다. 감사원은 기획단의 핵심관계자인 천조운 부단장(당시 정보화기반심의관)등을 징계하라고 정통부에 통보했다. 이로 인해 천 부단장은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이와 관련한 정통부 고위관계자 B씨의 설명.

“이권과 관련해 관련 업계가 감사원에 진정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감사원은 98년 11월에도 국가정보화 사업에 대한 특별감사를 했어요. 휴일도 없이 미래를 위해 일한 사람이 감사원 감사를 받고 더욱이 징계 통보를 받았다면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박성득. 정홍식 기획단장은 천국장에 대해 기고나 회고록을 통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보다 앞서 1995년 11월 13일 오후 3시 당시 정통부 박창환 부이사관(국제협력기획과장)이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별세했다. 그도 구축단 업무와 관련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해 일벌레로 통했다.


이와 관련한 미담.

그가 타계한 후 이건수 동아일렉트론 회장이 유가족 돕기에 나섰다. 고인의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전액 부담했다 . 당시 중.고학생이던 두 아들은 국내 명문대학을 졸업했다. 이 중 큰 아들은 올해 사법고시에 합격해 올 3월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 둘 째는 국내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큰 아들에게 세상견문을 넓히라며 올 봄에 해외여행도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듬해 노준형 반장이 정통부 통신망과장으로 발령이 나자 경제기획원에서 김동연 서기관이 파견나왔다. 그는 기획단에서 국가계획반장을 맡았다. 정실장과 천 부단장이 김 반장의 업무 능력을 높이 사 ‘정통부에 남으라’고 붙잡았으나 그는 경제기획원으로 복귀했다. 그후 경제기회원에서도 승승장구해 기획예산처 정보화담당관, 산업재정기획단장· 재정정책기획관 ,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국정과제비서관 등을 거쳐 현재 300조원이 넘는 국가예산을 다루는 재정부 예산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박성득 초대 기획단장의 회고.

“초고소망 사업은 우리나라 정보통신사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기폭제가 됐고 인터넷 성장과 괘를 같이 하면서 한국을 IT일등 국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홍식 기회단장의 회고록 증언도 이와 같다.

“이 사업의 성공적인 추진결과로 한국은 세계 일류는 정보통신 인프라 보유국이 됐습니다. 그 인프라를 기반으로 우리 IT산업이 도약해 왔습니다.”


이런 보람과 아픔, 슬픔의 과정을 거쳐 한국은 인터넷강국의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고속정보통신망구축사업은 한국정보화의 젓줄이자 국민 생활혁명의 힘찬 엔진이었다.


당시 기획단명함에는 소속과 이름 그리고 전화번호와 팩스가 전부였다.
불과 15년전이다. 지금은 이런 명함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명함에 휴대폰과 이메일은 기본이다. 팩스로 서류를 보내는 일은 보기 드물다. 이 사업은 공공부문의 정보화를 촉진하고 대국민 행정서비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행정의 효율성과 생산성도 높였다. 관련 기술개발로 IT산업과 국가경쟁력을 향상시켰다. 세계 각국에서 초고속망을 벤치마킹해 가는 나라도 적지 않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다.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 사업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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