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조직 개편과 개각 등으로 그해 12월은 행정부 분위기가 뒤숭숭했지만 기획단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이 21세기 고도정보화사회의 핵심기반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오직 일에만 전념했다.
7개부처와 산하기관 등에서 기획단으로 파견나와 얼핏보면 인적 구성이 외인부대 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기획단 구성원들은 끈끈한 동료애로 뭉쳐 일했다.
노준형 기획총괄반장(정통부장관 역임. 현 서울과학기술대 총장)의 기억.
“기획단장은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이 겸임했어요. 그래서 기획단의 실무는 천조운 부단장이 총괄했습니다. 당시 기획단장이나 부단장이 탁월한 리더십과 문제 해결능력을 발휘했어요. 일하는데 문제가 있으면 위에서 이를 다 해결해 줬어요. 기존 업무라면 부처 파견자들이 본부 간섭으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파견자보다 초고속망 업무를 더 잘아는 사람이 본부에 없었습니다. 본부에서 간섭을 하고 지침을 내려야 갈등이 생길텐데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가는 상황이어서 본부의 간섭이나 훈수 등이 전혀 없었습니다. 파견나온 인력들이 당시 그분야의 전문가들이라 간섭할 수가 없었어요. ”
노 반장 아래서 기획총괄계장으로 일했던 서홍석 사무관(현 우정사업본부 예금산업단장)의 말도 그와 일치했다.
“저는 천 부단장이 불러서 기획단에 들어 왔습니다. 과거 천 부단장이 장관비서관 시절 저는 장관 수행비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구축단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각 부처와 산하기관 등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한마음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습니다. 모두 국가 미래를 내다보며 일했어요. 당시 함께 근무하던 사람들이 파견이 끝난 후에도 모임을 만들어 만나곤 했습니다. ”
한해가 막을 내리는 94년 12월30일.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정부조직개편 후 첫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주재했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세 가지 현안 업무를 보고했다.
“ 정보통신부 출범을 계기로 정보산업육성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다음은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과 95년 5월에 열리는 APEC정보.통신장관회의 개최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소프트웨어산업을 중점 지원하고 핵심통신기술 연구개발을 추진하겠습니다”
95년 3월 14일 오전.
초고속정보화추진위원회(위원장 이홍구 국무총리)는 이날 회의를 열어 지난해 11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기획단이 마련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종합추진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이에 따라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은 국가사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와 관련, 정부는 오는 4월부터 6월까지 부처별로 정보화추진계획을 구체화,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키로 했다.
이홍구 국무총리(현 중앙일보 고문)는 "정보화야말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 우리나라를 21세기 세계중심국가로 진입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며 "정보통신부 신설을 계기로 초고속정보통신기반 구축사업이 촉진될 수 있도록 계획내용을 더욱 구체화하고 보강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가운데 1995년 5월2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제1차 APEC(아태경제협력체)정보.통신장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APEC정상회의에 참석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제의해 열린 것이었다. APEC 18개 회윈국 대표단과 APEC사무국관계자 등 3백40여명이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첫날 오전 회의에 참석, 연설을 통해 한국이 추진하는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 사업을 소개했다.
긷 대통령은 “ 한국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사업에 2015년까지 모두 6백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며 “한국은 이 사업 추진에 있어 앞선 나라의 경험과 기술을 폭넓게 받아 들이고 아울러 우리의 경험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나라와도 적극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의는 APII(아시아.태평양 지역정보통신기반)추진을 위한 서울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APII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 시간과 공간적 장벽을 허물고 경제공동체로서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회원국들의 정보통신기반구조를 확충하고 고도화하며 국가간의 자유로운 연동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이 회의를 주재한 경상현 장관의 회고.
“한국이 APII를 제안했습니다. 회의를 통해 아.태 정보공동체를 더욱 구화체횄어요. 한국이 첫번 째 회의의 개최국인데다 서울선언문을 채택하는 등 각국 간 협력방안을 심도있게 논의한 뜻깊은 국제회의였어요.”
서울선언문은 “모든 회원국이 초고속정보통신기반 구축을 위해 가능한 한 APII의 5대목표와 10대원칙에 부합되고 상호 보완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각국의 정보.통신장관이 채택한 5대 목표는 △상호접속되고 연동가능한 역내 초고속정보통신기반의 구축 및 확충 △ 정보통신 기반구조의 발전을 위한 회원간 기술협력 장려△ 자유롭고 효율적인 정보유통의 증진 △ 인적 자원의 개발 및 교류 강화 △APII발전에 적합한 정책 및 규제환경 조성 장려 등이었다.
각국 대표들은 APII구축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공동번영을 이룩하고 경제공동체로서의 초석을 다진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 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회 회의는 호주에서 개최키로 합의하고 30일 이틀간의 일정을 끝냈다.
한국은 이에 앞서 5월24일부터 26일까지 신라호텔에서 각국 고위 관계관회의를 열어 우리가 제의한 APII목표와 추진 원칙. 세부행동 계획 등과 정보.통신장관회의에서 채택할 서울선언문과 공동발표문 등에 관해 논의 했다. 한국측 수석대표는 정통부 강상훈 정책심의관(청와대 정보통신비서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역임. 현 감사)이 맡았다.
이 국제회의는 한국이 아.태지역의 정보통신 주도국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한국의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사업을 이들 나라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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