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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205>-하나로통신 출범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2. 7. 1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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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부는 하나로통신 납입자본금 마감을 8월23일에서 9월5일로 연기하고 법인설립 일정도 조정해 창립총회를 9월23일 열기로 결정했다.

 

하나로통신 컨소시엄에 참여한 444개 주주 가운데 지분 1% 미만인 중소기업이 422개에 달했다. 이 중 40%에 달하는 170여개가 자금난을 이유로 지분축소를 희망할 정도였다.

 

9월19일, 신 사장 내정자는 창립총회를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전국 초고속망 시내전화사업자라는 신조로 초고속인터넷 시대를 열어 나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서비스 일정은

▲하나로통신은 초고속망 시내전화 사업자라는 개념으로 회사를 설립하며 1998년 10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손익분기점 시기는 언제로 보나

▲2004년으로 가입자는 650만여명에 달할 것이다

-조직과 인력은

▲ 회사조직은 팀제로 운영하며 내년초까지 400여명을 확보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의견을 듣고 이를 토대로 실무진과 토론을 거쳐 중요 정책을 결정할 생각이다.

 

9월23일 오전10시.

 

하나로통신은 서울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최대주주인 데이콤을 비롯, 350여개 주주사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사진)를 열었다. 이어 내정한 신윤식 전체신부 차관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주주사가 444개에서 350여개로 준 것은 자금난으로 90여개가 자본금 납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감사에는 오성균 전국회통신과학기술위원회 수석전문위원(하나로통신 고문 역임), 부사장에는 김영철 데이콤 부사장(작고), 상무에 남기철 한국전력 정보통신처장(하나로산업개발 사장 역임)이 각각 선임됐다.

또 곽치영 데이콤사장 , 김정부 한국전력 전무, 서진구 두루넷부사장(코인텍 사장 역임), 서병문 삼성전자 상무(현 경기콘덴츠진흥원 이사장), 정일상 대우통신 전무(대우자동차판매 대표 역임), 김호영 현대전자 상무(현대해상화재보험 부사장 역임), 김신배 SK텔레콤 이사(현 SK C&C부회장) 등 모두 7명을 비상임이사로 선임했다.

 

하나로통신은 초기자본금을 7000억원으로 정했다. 하지만 경기침체에 따른 중소주주사들의 자금난으로 2차 실권주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하나로통신은 6004억원의 자본금으로 출범하게 됐다. 신 사장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하나로통신은 1998년 10월부터 3개월간 시범서비스를 거쳐 99년부터 서울, 부산 등 6대도시와 제주지역을 대상으로 상용서비스에 들어가고 2003년에는 전국서비스를 제공키로 했다. 서비스도 고도화된 시내망을 통해 기존 음성서비스는 물론 데이터, 영상이 복합된 초고속 멀티미디어서비스 제공에 주력키로 했다.

 

하나로통신은 2003년까지 총 5조8000억원을 초고속광통신망 구축을 위한 각종 전송 및 선로설비에 투자키로 했다.

서비스 첫해인 99년에는 국내 시내전화시장의 2.6%인 1천400억원의 매출에서 2004년에는 2조9000억원(국내 전체시장 10조4000억원의 28.4%)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윤식 사장은 전남 고흥출신으로 서울대를 나와 1964년 행정고시 1회에 합격, 체신부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체신부에서 전남 체신청장과 우정국장, 기획관리시장, 차관 등 체신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학구형 공직자였다. 차관시절인 1990년 중앙대에서 행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정보화사회의 정보통신 행정에 관한 연구’였다. 정통부가 출범하기 몇 해 전 이미 미래 행정조직에 관해 연구를 한 것이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매일 새벽 학원에 나가 일본어와 영어공부를 했다.

 

그의 학구열은 체신부 계장 시절부터 시작했다. 계장이지만 통신기술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남몰래 전기기사자격증을 따는 학원에 다녔다. 6개월 가량 다니자 학원측이 그에게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라고 권했다.

 

과장시절에는 현장 경험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점퍼차림으로 전화수리공 양성 학원에 다녔다. 전화 고장이 나면 전신주에 올라가 고치는 전기공학을 공부하면서 실무를 익혔다. 그가 체신부 과장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체신부 차관을 끝으로 2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 한 후 데이콤 사장으로 일했다.

그는 정권 교체기나 개각이 있을 때 장관 후보로 16번이나 언론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문민정부 출범 직전에는 김영삼 대통령당선자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 김 당선자와 독대를 했다.

 

그의 증언.

“1993년 2월20일 토요일 김 당선자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용인에서 정동로터리클럽 초대 회장으로 행사 중이었습니다. 당시는 휴대전화가 없어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았습니다. 다시 연락이 와 월요일인 22일 오후2시 서울 하이얏트 16층에서 김 당선자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호텔에서 1시간여 대화를 나눴다. 김 당선자의 인간적인 흡입력은 대단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 김 당선자는 철저한 보안을 당부했다. 아내한테도 비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장관 발탁은 불발로 그쳤다. 김 당선자와는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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