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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213>-ADSL주문폭주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2. 8. 2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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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하나로통신은 세계 최초로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상용화에 성공했지만 마(魔)의 늪인 자금유동성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하나로통신은 소멸이라는 무대에 서야했다.

 

하나로통신은 대주주가 바뀌면서 사명을 하나로텔레콤을 바꾸고 다시 SK브로드밴드로 변경했다. 빛과 그림자는 흥망(興亡)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과거 일이지만 하나로통신이 SK브로드밴드로 바뀌기까지 흔적을 따라가 보자.

1999년 4월1일 김대중 대통령과 신윤식 하나로통신 사장(체신부 차관, 하나로통신 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회장)간 영상통화는 하나로통신에 천군만마였다. 그것은 빛이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인터넷이 일반적인 통신은 물론 경제활동의 핵심수단으로 등장할 것”이라며“ 국민들과 기업들이 편리하고 저렴하게 인터넷 등의 첨단통신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고 하루 빨리 세계 유수의 통신업체와 경쟁할 수 있는 회사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과 신 사장 간 영상통화 장면은 국내 언론매체에서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이 바람에 정통부 업무보고 내용은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렸다. 정통부는 ‘언론플레이를 한 것이 아니냐’며 하나로통신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나로통신은 이런 오해를 해명하느라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하나로통신은 이런 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신윤식 사장의 회고.

“한국통신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하나로통신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비장한 각오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어요. 소비자 반응이 예상을 뛰어 넘었습니다.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어나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어요. 나중에 ‘너무 빨리 일을 진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로통신은 서울과 부산, 인천, 울산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어 12월 대구, 광주, 대전, 수원으로 서비스 지역을 확대했다.

당시 인터넷은 전화모뎀 위주였다. 한국통신(현 KT)은 1993년부터 데이터통신이 가능한 종합정보통신망(ISND)을 내놓고 인터넷시장을 공략하고 있었다.

 

하나로통신이 이런 시장에 기존 전화모뎀보다 속도가 100배 빠른 ADSL서비스를 내놓자 소비자들의 눈길이 이 서비스로 확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나로통신은 300가구 이상 아파트단지 새마을부녀회와 주민을 대상으로 시장개척에 나섰다. 인기 가수 유승준을 모델로 내세워 ‘뛰는 ISDN 나는 ADSL'이란 공격적인 광고를 시작했다.

 

그해 8월에는 ADSL라이프를 출시했다. 초고속인터넷과 전화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는 사용료가 월 2만9000원이었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마치 봇물이 터진 듯 했다.

하나로통신 통신망구축팀은 1일 3교대로 일을 했다. 그래도 일손이 모자랐다. 12월이 되자 장비가 없어 공급을 할 수 없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왜 우리 아파트에 ADSL을 설치해 주지 않느냐”며 항의 전화를 해 왔다.

 

이승석 하나로통신 전송망계획실 부장(현 SK브로드밴드 부문장)의 증언.

“생산업체인 벨기에 알카텔이 필요한 모뎀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습니다. 물량수주 전쟁이 벌어진 것이죠. 비상이 걸려 그해 2월 제가 벨기에 알카텔로 날아가 생산라인을 지켰습니다. 2주간 머물면서 생산 물량을 모두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하나로통신이 세계 모뎀의 80% 정도를 소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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