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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빛도서관에서 만난 노 전대통령의 "누가 이 청년을... "

이현덕 칼럼

by 문성 2009. 11. 2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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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꿈빛도서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쓴 글과 만났다. 

부천시립도서관은 시내 5곳에 분관을 설치해 시민들의 책읽기를 돕고 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꿈빛도서관 분관이다.  도서관에서는 책 대출과 더불어 연극 공연이나 문화 강좌도 열고 있다. 
책을 빌릴 요량으로 꿈빛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그의 글이 실린 책을 서가에서 발견한 것이다. 
 지난 10월 초부터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데 아주 편리하고 유용하다. 필요한 자료는 복사하면 된다. 구내에서 복사카드를 구입하면 한 장 복사는데 30원 꼴이다. 문방구에서 복사하는 것에 비해 훨씬 싸다. 언젠가 복사할 일이 있어 문방구에 갔더니 실비로 받는다며 한 장에 50원을 받았다. 
 지자체들이 엉뚱한  곳에 예산을 펑펑 쓸게 아니라 시민들의 삶을 향기롭게 하는 도서관을  많이 설치하면 좋겠다. 

 도서관에 가면 정겨운 풍경을 볼 수 있다. 책읽은 모습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아름답다.  특히 어린이나 유아실은 불 때마다 절로 미소가 번진다. 유아실은 벽쪽으로 서가를 설치하고 방 가운데 앉은뱅이 원탁 책상을 놓았다. 어린이들이 돌아다니다 넘어져도 다칠 염려가 없다.
  대여섯살 남짓한 아이가 어머니와 마주 앉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귀엽고 깜직하다. 간혹 아빠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도 본다. 참 자상한 아빠다.  저렇게 자란 아이들은 평생 책과 벗하며 인생을 지혜롭게 살 것이다. 저 아이중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엊그제 빌린 책을 직원에게 반납했다. 그리고 서가에서 책을 고르다 문득 시선이 한 곳에 멎었다. 
‘해인사를 거닐다’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였다.  해인사는 나와 인연이 깊다. 오래 전 건강이 나빠 가야산 자락의 해인사 길상암에서 여름 한철 요양을 한 적이 있다.  해인이란 ‘바다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절’이란 의미다.

 책을 뽑아 표지를 보았다.  리영희 선생과 김훈. 유홍준, 정찬주 등 24명의 산문이 실렸다. 중간 쯤 필자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언제 노 전대통령이 글을 썼나. 아니면 동명이인가.
책을 펼쳐 보니 노무현 전대통령의 글이었다.  이 책은 해인사에서 발간하는 ‘월간 해인’의 칼럼 ‘유마의 방’에 실린 글중 24편을 골라 엮은 산문집이었다.
지난 2003년 4월에 나왔다. 그 당시는 그가 대통령 재임시였다. 그 전에 월간 해인에 글을 실었던 모양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해인사를 세 번 방문했다.

(사진은 2003년 12월 22일 해인사 방문 모습)

 

노 전 대통령이 쓴 글은 ‘이 청년을 누가 내게 보냈을까’라는 제목이었다. 인과응보를 주제로 한 글이었다. 국회의원시절 종로의 ‘딸배’(신문배달을 하는 사람을 지칭함)들과 만남과 법정 다툼, 그리고 재회 등을 그렸다.  비록 몇 해 전 쓴 글이긴 하나 읽을 수록 가슴에 와 닿았다.

노 전대통령은 지난 5월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다소 긴 글이지만 그가 쓴 글의 전문을 소개한다.   


제목/ 이청년을 누가 내게 보냈을까


인과응보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고 있다.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만들고 결과 역시 원인 따라 보답을 받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더욱 더 인과응보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된다. 저 서슬이 푸른 권력의 그늘 아래서 무슨 일이든 마음 먹은대로 할 수 있었던 사람들..... 심지어 신성한 종교까지도 짓밟아 법란으로 지탄받은 사람들이 역사의 준엄한 심판대에 올라 있음을 볼 때 인간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인과응보며 중생들이 인생을 얼마나 겸허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마치 대단한 인생 철학이라도 설파하듯 늘어놓다 보니 조금 주제 넘는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게 느껴지며, 이 역시 오만이라서 인과응보의 교훈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결과가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아주 소중한 교훈이기에 이해를 부탁드리고 싶다.

  나는 이른바 인권 변호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때마침 전 국민의 시선을 한데 모은 5공 청문회 덕택으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것은 정치 초년생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른바 청문회 스타라는 이름 값을 톡톡히 치루었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문제이든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야말로 요술방망이를 가진 사람인 줄 알고 찾아와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막무가내로 부탁했다.

  그러나 이들이 부탁하는 일들은 억지스러울 때도 있지만 조용히 애정을 가지고 들어보면 모두가 안쓰러운 사연이고 서민들의 삶에서는 그만큼 절실한 것이기도 했다.

  만일 내게 힘이 있다면 모두 해결해 주고 싶은 그런 일들..... 그러나 과연 내가 해결해 준 일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내가 처음에 이야기한 소중한 체험도 그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칠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의원회관으로 청년 몇 명이 찾아왔다. 전혀 기억에 없는 생면부지의 청년들..... 그 가운데에는 소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아주 나이 어린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종로의 '딸배'라고 했다. '딸배'가 바로 신문배달을 의미한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들이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당시 그들은 아주 열악한 조건에서 배달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자기들도 권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문회를 보면서 또는 사회를 풍미하는 민주화의 열풍 속에서 그들도 자각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결을 해야 했고 그러자니 이 역시 기득권 세력과 첨예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 세력들은 '딸배'들이 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가졌고 또 그 힘은 막강한 언론사를 배경으로 했다.

  나는 생각했다.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솔직히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어떤 시원한 대답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이 내게 말했다. 그냥 자신들이 투쟁하고 있는 현장을 한번 방문이나 해달라고. 그것만으로도 자기들은 용기를 갖게 된다고.

  종로의 한 동네에 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한옥집에서 나이 어린 '딸배'들이 말 그대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전기가 끊기고, 폭력배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일곱 명이 해고되는 등..... 막상 그 모습을 보자 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이 무슨 짓을 했다고 폭력을 동원하는가. 나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최루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던 투지가 되살아났다. 나는 내가 아는 법지식을 동원해 불법적인 일들을 조목조목 지적했고, 말문이 막힌 관리인의 모습을 보면서 딸배들의 얼굴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감돌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 다음날, 그 신문사의 기자 한 사람이 의원회관에 나타났다. 기자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정치가가 정치나 잘 하면 되지 이런 일에 왜 참견이냐"고. 나도 대답했다. "기자는 기사나 잘 쓰라"고.

  그 후 딸배들은 삼 년이나 재판을 진행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그 뒤로도 '딸배'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권익을 찾는 데 더욱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생활 조건이 향상이 되었다고들 감사해 했다. 그로부터 칠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칠 년은 내게 무척 긴 세월이다. 그 동안 3당 야합이 있었고 그것을 거부했던 나는 원칙과 명분만으로 국회의원과 부산시장 선거를 치루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의 일이다. 전화가 온 것이다. 전혀 예상치 않은 사람으로부터였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전화를 받는 나로서도 이 전화만큼은 특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바로 '딸배'였다.

  칠 년 전, 바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찾아왔던 '딸배'의 지도자.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는 아직도 '딸배'들을 위해 일하며, 한복 디자이너로도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말 반가웠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그가 나에게 한 말은 또 한 번 나로 하여금 인과응보를 생각하게 하였다.

  그는 이번에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무슨 은혜를 갚느냐고 했더니 그냥 웃기만 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웃음의 의미가 자원봉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조금은 망설여졌다. 물론 더없이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에게 귀떨어지지 않게 인생을 제법 치열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늘 가슴속에 남는 의문이 있다. 나는 과연 인생을 후회 없이 살고 있는가. 이 다음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내 자식들은 애비를 부끄럽지 않게 생각할 것인가. 내가 마지막 가는 바로 그 순간에 내 스스로에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단 한마디, "너는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었다"하고 할 수 있는가.

  시인 윤동주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했다. 내가 어찌 감히 윤동주 선생과 비교를 할 수 있을까만 그래도 나 역시 소망하는 것은 하늘은 아니더라도 내 자식에세만은 부끄럽지 않은 애비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생은 자기가 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나쁘게 살면 나쁜 결과가, 바르게 살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생은 그냥 흘러가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오묘한 부처님의 섭리가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하늘 그물이 성긴 것 같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성현의 경구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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