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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244>-서정욱 박사 TDX개발단장에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3. 2. 1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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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26일.

 

전자통신개발추진실무위원장인 오명 체신부 차관(체신부, 건설교통부, 과기부총리 역임. 현 웅진에너지 폴리실리콘 회장. KAIST 이사장)은 체신부 회의실에서 경제기획원과 상공부,체신부, 과학기술처 실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조직 신설을 결정했다.

 

전자교환기 개발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에 TDX사업단과 품질보증단을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에 TDX개발단을 설치하는 내용이었다.

 

연구소에는 이미 시분할교환기 개발단이 설치돼 양승택 박사(ETRI원장, ICU 총장, 정통부 장관 역임. 현 IST컨소시엄 대표)가 단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통신공사 TDX사업단은 생산업체 제품을 구매하고 현장에 설치 운용하는 전 과정을 관리하며 품질보증단은 생산업체 제품 품질을 보증하고 인증하는 업무를 맡는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구상은 오명 차관의 아이디어였다.

 

오명 차관의 회고.

“나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포병용 컴퓨터를 개발해 본 경험이 있어 개발 이후 실용화까지 거쳐야 할 여러 과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산업계는 품질보증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군용부품은 굴렸을 때, 떨어뜨렸을 때. 더울 때, 추울 때,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성능 변화 등 무척 까다로운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나는 TDX도 이런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발 이후의 오류를 막을 수 있고 국산 제품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잘못된 인식을 깰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자서전 ‘30년후의 코리아를 꿈꿔라’에서)

 

그해 6월 체신부는 한국통신전기공사에 TDX사업단을 설치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체신부의 이런 지시에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내부 반응은 억지춘향이었다.

 

당시 한국통신 고위 간부 L씨의 증언.

“한국통신에서는 기존 상용제품 중에서 품질좋고 값싼 제품을 구입해 사용하면 되는데 왜 우리가 240억원이란 돈을 부담하면서까지 제품을 개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팽배했습니다. 외국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는 상황에서 국내 기술진이 전자교환기 개발을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감도 있었어요.”

 

한국전기통신공사가 교환기 개발비를 부담하게 된 것은 체신부가 1982년 1월1일 공사로 독립시키면서 “전기통신사업자는 연구개발비로 연간 매출액의 3%이상을 투자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을 만든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통신공사측은 연구비 출연에 비협조이었다. 이런 비협조는 체신부가 한국통신공사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해소됐다. 시행령 개정안과 관련, 양승택 단장은 최순달 장관과 오명 차관에게 시행령 개정안에 ’연구소 연구비도 출연한다‘는 내용을 넣어 달라고 건의했다.

 

양 단장의 증언.

“안을 만들어 오라고 해 연구비의 출연 또는 출자한다는 조항아래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연구비도 출연하다는 조항을 신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도 장관 결재시 그런 내용이 빠져 있어 최 장관이 고용갑 과장(부산체신청장 역임)에게 지시해 그 조항을 넣었다. 1983년말 시행령이 공포돼 1984년부터는 안정적인 연구비를 출연해 연구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오 명차관의 계속된 회고록 증언.

“연구소가 개발한 제품이 현장에서 말썽없이 사용되려면 엄격한 품질보증과 시험 평가가 중요하다. 그리고 구매 활용계획도 세워야 한다. 이 모든 일을 맡아줄 사람이 바로 사업단장이다. 이 역할은 남에게 욕먹은 일이다. 간섭을 받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일찍부터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장(ADD)을 지낸 서정욱 박사(사진.과기부 차관. 과기부 장관 역임)였다.”

 

서 박사는 1957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텍사스 A&M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70년 귀국해 ADD 창설에 참여했다.

군전자통신 연구개발 책임을 맡아 첫 국산 분대용 무전기(KPRC-6)를 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ADD에서 13년간 일하면서 부장과 본부장, 진해 해군연구소장을 거쳐 소장까지 역임했다. 일에 관한한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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