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검찰총장 후보인 김진태 전 대검차장이 강릉지청장 시절인 1966년 쓴 경허 대사의 제자인 수월 스님(사진)의 일대기를 다룬 ‘물을 듣는 강물(사진)’이 뒤늦게 화제다
이 책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그의 정신 세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김 후보자가 1973년 유신 반대운동을 벌이다 사찰에 피신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책은 경허스님의 상좌로 알려진 수월스님에 관한 이야기다. 김 후보자는 2004년 수월 스님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 '물속을 걸어가는 달(사진)' 개정판을 펴냈다.
수월 스님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대사의 맏 상좌다. 경허 대사는 수월과 혜월, 만공의 제자를 두었는데 이들은 경허 대사가 자랑하는 ‘세 개의 달’ 이라고 한다.
수월 스님은 자신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고 오직 자비행만 실천하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 떠났다. 그래서 그를 ‘자비도인’이라고 불렀다.
수월의 법명은 음관(音觀). 충남 홍성군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살이를 했다. 그의 성이나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 그 자신도 단 한번도 자신의 신분을 얘기한 적이 없다고 전한다.
그는 29살이란 늦은 나이에 홍성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을 찾아 출가해 성원 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해 불경을 한 자도 외우지 못했다. 이에 지친 태허 스님이 수월에게 부목과 공양주 소임만 3년간이나 맡겼다. 워낙 머리가 둔해 다른 일을 시킬만 한게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를 바보로 평가하고 함부로 대했다.
33살이던 어느 날 부처님 사시 마지를 가지고 법당에 갔다. 마침 부전스님이 천수경을 외고 있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천수경을 듣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번 듣고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머리가 나빠 그토록 바보라며 구박만 받았는데 442자인 천수경을 한 번 듣고 다 외우고 만 것이다. 이 때부터 스님은 밥을 짓거나 나무를 하러 가거나 오직 천수경을 외우며 생활했다.
어느 날, 밤늦게 태허 스님이 방앗간 앞을 지나는데 물레방아는 돌아가는데 “쿵 쿵”하는 방앗공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방앗간을 들여다본 태허를 깜짝 놀랐다.
수월이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물레방아는 돌아가도 방앗공이는 멈춰 있었다. 태허가 수월을 급히 끌어내자 방앗공이는 ‘쿵’하며 내려왔다. 태허는 느끼는 바가 있어 그날 수월에게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다. 그리고 동생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날부터 수월은 용맹전진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수월은 문을 걸어 잠그고 천수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문밖으로 밤낮가리지 않고 천수경 외는 소리만 들려 왔다.
그로부터 7일째 되는 날. 수월이 방문을 박차며 뛰어 나왔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식음을 끊고 ‘천수경’를 암송한 수월은 마침내 깨닫음을 얻었다. 그가 머물던 방에서 방광(放光)이 일어 절 아래 사람들이 산불이 난 줄 알고 뛰어 올라오기도 했다.
이때부터 수월은 한번 보거나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 불망념지(不妄念智)를 얻었다. 그후 수마를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일자무식이어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문도 써지 못했던 수월은 이날부터 사람이 변해 있었다. 불망념지의 신통력을 얻은 후 부터는 어떤 경전이나 문장도 막히는 게 없었다. 한 번 보고 들은 경전이나 문장은 모두 기억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수월 스님은 4월 초파일 때 신도들이 원하는 바를 축원하기 위해 신도의 가족 상황을 듣기만 하고 법당에서 이름과 순서 하나 틀리지 않고 부처님에게 축원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는 대가족제여서 보통 한 가족이 20여명의 이름을 축원했다. 절 신도가 수백명이면 수 천명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데 스님은 이름을 다 기억하셨다고 한다.
수월은 깨달음을 얻고 틈틈이 스승 경허로부터 짚신 삼는 기술을 배웠다. 나중에 수월은 북간도에서 머물 때 수많은 동포들에게 짚신을 삼아주었다. 수월은 평생 울력과 묵언, 하심의 수행에 철저했다. 간혹 큰 절에서 조실로 모셔걌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한 동안 스님은 유점사 마하연에서 조실로 계셨다. 그 때 있었던 일이다.
스님은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수행에 정진하셨다. 절에서 가꾸는 채소밭이 있는데 맷돼지 피해가 심했다. 그래서 수월 스님이 채소밭을 가꾸고 돌보자 맷돼지와 벌레 들의 피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어느 날 공양주가 무가 너무 잘 자라 먹음직스럽자 몰래 무를 하나 뽑아 먹다 턱이 빠지고 말았다. 그날 밤 공양주 꿈에 산신이 나타나 꾸짖는 게 아닌가.
“ 그 무를 누가 가꾸는데 감히 함부로 손을 대다니”
공양주는 이튼날 새벽 수월 스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수월 스님이 그말을 듣고 산신각으로 올라가 말했다.
“뭐 그깐 일로 그래. 좀 봐주게나”
그러자 공양주의 빠진 턱이 금새 나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경허의 세 달중 상현달이 되어 20여 년간 북간도에 머물면서 나라를 잃고 떠돌던 조선 민초들에게 묵묵히 짚신과 주먹밥을 만들어주며 살았다. 수월은 자비로웠다. 특히 천수경을 좋아해 평생 천수경을 외우면 살았다고 전한다.
스님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오도송이나 열반송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북간도에서 작은 초막을 짓고 손수만든 짚신과 주먹밥을 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가져 가도록 했다는 것만 전해온다. 스님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 주었다. 수월스님 주변에는 만주 들판의 사나운 짐승들도 순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가 산으로 돌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스승 경허 선사가 입적하자 세 제자의 반응이 달랐다고 한다. 수월은 크게 웃었다. 혜월은 춤을 추었으며 만공은 울었다. 수월은 스승이 이제 세상 인연을 끊고 극락으로 가셨으니 좋아서 웃었고, 혜월은 극락간 것을 축하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스님은 74세로 입적했다. 개울에서 몸을 정갈하게 씻은 후 짚신을 머리에 이고 열반에 들었다. 스님을 다비하고 다음날 마음 주민들이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더니 남쪽으로 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을 도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것이 무엇인고 하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겨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혀서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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