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만나야 겠다"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현 s&t회장)의 마음은 쉿덩어리처럼 무거웠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검찰의 PCS의혹 수사와 관련해서였다. 대검 중앙수사부(이명재 검사장)가 PCS 의혹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통부 고위 간부들이 연루됐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1998년 5월 하순 어느날.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선 배 장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통령님, 정통부 차관과 국장들이 비리에 연루됐다고 하니 장관으로 일 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민간 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해 봐서 잘 압니다만 기업에서 무슨 말을 못합니까. 이번 PCS 의혹 건은 제게 맡겨 주시고 한 번 선처 해 주십시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비리나 뇌물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민간 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하던 저를 장관으로 임명하신 후 차관과 국장들에게 ‘장관을 잘 보필해 지식정보화 정책을 잘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배 장관은 이에 앞서 정홍식 차관(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사장 역임)을 불러 비리 여부를 확인했다.
“정 차관, 혹시 문제가 될 게 있습니까.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정 차관은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배 장관은 정 차관의 인품이나 언행을 볼 때 거짓말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래서 청와대로 올라간 것이다.
김 대통령의 반응은 냉담했다.
“배 장관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왜 그래요. 이럴 때는 모른척 하세요. 공무원 비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김 대통령의 어조는 단호했다. 배 장관은 더 이상 대통령에게 말을 하기 어려웠다.
배 장관의 회고.
“ 김 대통령의 입장이 확고하니 그 다음부터 정통부 장관이 힘을 쓸 수 없었어요. PCS 수사는 김 대통령의 의지라는 점을 확인했어요.”
배 장관은 김종필 국무총리서리(국무총리. 자민련 총재 역임)에게도 구명 호소를 했다. 배 장관은 자민련 몫으로 입각했다.
배 장관은 김 총리서리에게 “제가 데리고 일하는 공직자들입니다. 한번 만 너그럽게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김 총리서리는 현대 정치사의 풍운아였다. 그는 숱한 정치적 격동기를 겪었다.
김 총리서리는 “기업들이 돈 줬으면 가만히 있지 왜 말을 해 문제를 만드느냐”고 했다.
배 장관에게 대통령 독대를 조언한 이는 오명 전 체신부 장관(건설교통부. 과기부총리 . 건국대 총장 역임. 현 동부그룹 반도체IT전자부문 회장)이었다.
배 장관의 계속된 증언.
“오 전 장관은 고교 선배여서 공직 생활에 관해 많은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검찰수사에서 PCS 사업자 선정에 정통부 고위 인사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자 오 전 장관이 공무원들의 억울한 심정을 대통령에게 말씀드리라고 하더군요. ”
그해 5월 중순과 하순에 대검중수는 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정통부 고위 공직자 2명을 구속했다. 잔인한 5월이었다.
그해 5월 27일. 대검 중수부는 정홍식 정통부 차관이 1996년 PCS사업자 선정당시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으로 근무하면서 모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를 잡고 수사중이라고 밝혔다. 검찰관계자는 “아직 소환 조사할 정도의 혐의는 확인하지 못했다”면서 “혐의가 확인 되는대로 소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이 전해지자 정통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정통부의 반응은 한마디로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권력 핵심부인 청와대에서 10년, 정통부에서 10년 간 근무하면서 탁월한 리더십과 업무능력을 바탕으로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운 그가 “뇌물을 받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 차관은 이날 간부들에게 비리혐의를 강력 부인했다.
검찰의 발표에 대해 정통부 안팍에서는 두 가지 기류가 형성됐다.
하나는 PCS 사업자 선정 후 감사원 감사에 이어 새정부 출범 후 대통령직 인수위의 요청에 따라 감사원 특별감사를 받았으나 별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시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전 정권을 향한 현 정권의 의중이 담긴 정치적 표적수사라는 반응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석채 전 장관(현 KT회장)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가 귀국을 하지 않는 바람에 아랫사람들이 다치게 된 것 이라는 시각이었다.
검찰은 사업자 선정과정에 이 전 장관과 고교 후배인 김현철씨(현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와 연결고리를 찿고자 했지만 이를 밝혀내지 못했다. PCS 의혹수사는 시작부터 이 전 장관을 넘어 전 정권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특혜의혹의 핵심으로 지목했던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공직자 비리수사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를 부인했다. 해당업체의 장부를 압수해 분석하다 드러난 비리라는 것이다.
당시 고위 공무원이었던 A씨의 말.
“ 만약 이 전 장관이 국내에 있었다면 PCS 의혹수사는 양상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가 국내에 없다보니 흔히 하는 말로 호랑이는 못잡고 대신 토끼를 잡은 격이죠. 검찰은 이 전 장관이 사업자 선정과정에 특정업체에 특혜를 줬을 것이라는 전제아래 수사를 했지만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어요.“
대겸중수는 그해 6월 1일 오후 2시 정홍식 전 차관을 소환했다.
대검중수부는 정 전차관이 PCS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특가법상 뇌물 등 혐의로 구석영장을 청구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정 전 차관은 검찰에서 뇌물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검찰은 2일 오후 정 전차관을 구속했다. 그에겐 일생일대의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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