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 근교 한 사찰에 다녀왔다.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가까운 사찰을 찾고 있다. 이제는 주말 일정으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했다. 한 곳만 고집하지 않는다. 마음이 소매를 잡아당기는 대로 이곳 저곳에 있는 사찰을 향해 떠난다.
이런 나를 보고 어떤 이는 “아직 인연因緣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튼 주말 사찰순례는 나한테는 즐거움이다.
월요일부터 주말이 기다려진다. 남들은 월요병이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주말병이라고 할까.
주말 산사 여행은 내 생활의 활력소다. 산사에 가면 자연의 정이 가득하다. 언제나 그 정을 만끽할 수 있다. 무언無言의 정이고 마음의 정이다. 법당의 부처님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춥거나 덥거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같은 모습이다. 항상 염화시중의 미소로 깨달음의 메시지를 던져 준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골치 아픈 세상살이도 그 곳에 가면 한줌 티끌이 된다. 천근 무게의 고통도 한 줄기 연기로 변한다.
집을 나선 지 두 시간여 만에 경기도 한 산사에 도착했다. 가파른 고갯길을 힘들게 돌아 도착한 산사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한여름이면 매미소리라도 들릴 법하건만 초겨울의 싸늘한 산바람만 우리 내외를 반기듯 휘감고 지나갔다.
사찰을 살포시 보듬고 있는 뒷산에는 아직도 오색 단풍들의 여린 자태가 남아 있었다. 단풍들이 떠나는 늦가을의 끝자락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연의 매듭이 덜 풀린 모양이다. 산위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단풍잎이 눈발처럼 우수수 사방으로 날렸다.
사람이 살다보면 숱한 우여곡절을 겪기 마련이다. 그것이 삶의 일대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 삼년 전만 해도 절은 나한테 낯선 공간이었다. 머리 깎고 먹물 옷 입은 스님들이 사는 곳 정도로 생각했다. 절의 문턱도 높아 보였다.
나와 다른 세상에서 약간은 별난 사람들의 생활 거주지로 여겼다.
언제 봐도 고요함과 적막감에 휩싸인 곳. 세상을 향한 문을 반쯤 닫아 놓고 사는 곳. 일반인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곳. 이런 게 내가 가진 절에 대한 관념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1997년 초여름 내가 생사의 고비를 넘긴 뒤 사찰은 내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요 의지처로 변했다. 포근한 어머니의 치마폭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해 유월 초순 나는 길바닥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서 만 하루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주위에서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집안에서는 장례식 준비까지 했다니 그럴 만도 했다.
그후 나는 아는 분 소개로 그해 여름 한철을 해인사 길상암에서 요양생활을 했다.
멍들고 지친 육신을 이끌고 가쁜 숨을 헐떡이며 길상암 (사진)을 찾던 날 주지인 명진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게 인연입니다. 더욱 불법과 인연이 없으면 부처님 품속으로 올 수 없습니다.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니 마음 편안하게 요양하세요”
그렇게 시작된 절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요사채에 머물면서 하루 세 번 예불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도 힘들었다. 주지인 명진 스님이 단 한번도 예불에 빠지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불참할 수가 있겠는가.
하루 이틀 지나자 나는 차츰 잃었던 본래의 나를 되찾기 시작했다. 티없이 맑고 푸른 하늘과 가야산의 맑은 공기. 홍류동 계곡의 우렁찬 물소리는 삶의 청량제였다.
그 속에서 나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세속에 찌들 대로 찌든 내 영혼의 찌꺼기를 씻어낼 수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가야산을 온통 은색으로 물들이면 솔바람과 풍경소리를 벗삼아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길상암 여름 한철은 나한테 새로운 세상과 만남이었다. 그동안 접해 보지 못했던 불·법·승과의 고귀한 상봉이었다.
그해 시월 들녘에 수확의 손길이 한창이고 가야산 단풍이 홍류동을 붉게 물들일 무렵 나는 길상암 그늘을 떠났다. 건강이 좋아져 회사에 출근했고 새로운 보직도 받았다.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길상암을 찾았다. 명진 스님한테 역대 조사들의 수행담도 자주 들었다.
명진 스님은 자신한테는 서릿발처럼 엄격했지만 신도들한테는 하심下心으로 대했고 언제나 봄 햇살처럼 따스했다. 이십육년 간의 기도 끝에 부처님 진신사리 삼십사과를 길상암에 모셨다고 한다.
그런 명진 스님이 이듬해 십일월 갑자기 열반에 드셨다. 내가 스님을 뵌지 일년 육개월만의 이별이었다. 좋은 인연은 신神들도 시샘한다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는 한차례씩 가슴앓이를 한다. 지난 시절의 짧은 인연이 그립고 아쉬워서였다.
지난 달 나는 명진 스님 2주기에 다녀왔다. 계곡 건너 우뚝 선 부처님 진신사리탑, 법당의 부처님과 풍경소리, 요사채 앞에 우뚝 선 소나무, 홍류동의 우렁찬 물소리와 솔향기 등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예전 얼굴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이 많았다.
세월의 무상함이 한 줄기 바람처럼 내 마음을 휘감고 지나갔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금강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 같고 이슬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같이 볼지어다” 하는 내용이다.
정말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속세를 사는 누구인들 가슴 애틋한 지난 날의 추억이 없겠는가.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게 세월이라고 한다.
가는 세월 남의 일이 아니다. 인생이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홀로 선 허수아비 신세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세상나들이가 끝나면 홀로 떠나야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저승길에 입는 삼베옷에는 주머니도 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요즘 세상은 삭막하다. 인정은 메말라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마음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세상일은 내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이 세상은 바로 내 마음의 그림자다. 외로움과 허전함도 내 마음 탓이다. 불행은 남과 비교할 때 시작된다고 한다. 내 마음이 향기롭다면 세상도 향기롭고, 내 마음이 맑다면 세상도 맑을 것이다.
나는 삶을 두 번 산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덤으로 산다.
그래서 주말이면 세월의 속삭임을 마음으로 듣기 위해 산사를 찾는다. 오가는 세월의 발자국 소리를 가슴으로 듣고 싶은 것이다.
산사에는 집착이나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과 개운함이 있다. 그것이 내가 절을 찾는 이유라면 이유이다. 산사는 나보고 오지 말라고 하지 않으니 따지고 보면 모든 절이 내가 갈 곳이다.
간혹 다정다감한 스님을 만나 얻어 마시는 차맛도 산사를 찾는 즐거움을 더해 주는 요소다.
이번 주말은 어느 사찰에 가서 세월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올까. 그 곳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기다려지는 주말 산사 여행이다.
<이 글은 2000년 12월 해인지에 실린 글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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