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들어 첫 정보통신부 장관은 진대제 삼성전자디지털미디어 총괄 사장(사진. 청와대)이 발탁됐다. 그는 아들의 병역문제로 곤혹을 치렀으나 고비를 넘긴 후 최장수 장관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스타장관이었다. 2003년 3월 28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업무보고를 파워포인트로 해 다른 부처에 비상이 걸리게 했다. 이어 첫 pm제도를 도입하는 등 정부의 혁신드라마를 주도했다. 그는 새성장 모델 1T839전략 수립과 정국의 골칫거리인 DTV전송방식논쟁을 해결했다. 이어 APEC정상회의 기간 중 it전시회를 열어 각국 정상들에게 한국의 ICT발전상을 소개했다.
그는 장관 재임 시 진행한 각종 업무를 노트에 꼼꼼히 기록했다. 모두 16권이었다. 그와는 아침 7시 이전에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전화 통화를 했다. 그 시간대에 전화 통화를 한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이어 노준형 차관이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도 경제기획원 출신이다. 그는 제한적인 인터넷본인확인제를 도입했으나 뒤에 위헌판결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개각에서 유영환 차관이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조직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했다.
정보통신부 관료중 입지전적인 인물로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박성득. 김창곤 전 차관이다.
박성득 전 차관(사진. 전자신문)은 기술계의 대부로 기술고시 출신 첫 차관이었다. 전국의 가난한 집안 수재들이 다 몰린다는 체신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체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주요 요직을 거쳐 급으로 5년이나 재임했다. 작은 키에 호방한 성격이어서 별명이 ‘작은 거인’, 중국의 등소평과 비유해 ‘박소평’으로 불렸다.
김창관 전 차관은 기술고시 합격 후 다른 부처로 발령이 나자 체신부로 오기 위해 다시 기술고시를 본 남다른 이력의 소유자다.
특별기획에서 기업과 민간을 다루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쉽다.
특히 미수교인 중국을 오가며 TDX 등 전자제품 수출의 외교관 역할을 한 김호용 한샤인인터네셔널 회장과 이건수 텔레콤회장의 활약상은 많은 부문이 베일에 가려있다.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모 장관의 가정사는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혼외 아들이 바르게 잘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직자는 리더십과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계급장을 떼고 나면 남는 건 공과(功過)뿐이다. 정보통신부를 대신해 미래창조과학부가 국운융성의 미래융합전략을 창조해 디지털강국의 주역이 되길 기대한다. 차기 정권에서 없어질 부처 1순위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특별기획을 연재하는 동안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증언하고 자료를 챙겨 주신 모든 분들과 전자신문 전.현직 발행인과 편집국장, 편집국 후배들에게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부족한 글을 애독하고 분에 넘치게 격려와 성원을 보내 주신 애독자들에게도 사의를 표한다.
언제나 그렇듯 허허로움과 부족함을 느끼며 노트북을 닫는다. <끝>
이현덕의 정보통신부<414>에필로그<2> (0) | 2018.07.31 |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413 >에필로그<1> (0) | 2018.07.27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412> "정통부 역사속으로" (0) | 2018.07.25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411> '마지막 정보통신인 신년회' (0) | 2018.05.16 |
이현덕의 정보통신부<410>인수위,"노 대통령…오만과 독선의 발로" (0) | 2018.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