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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들이 (4) 덕숭총림 수덕사 <상>

사찰기행

by 문성 2019. 5. 3.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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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총림 수덕사(사진. 수덕사) 가는 길은 한산했다. 평일 오후 오후 3시경이어서 그런 모양이다오가는 차량도 많지 않았다.

고요한 시골 길을 달리는 기분이다. 차 길이 막히지 않으니 마음도 평안했다. 도로 양옆에는 활짝 핀 벚꽃이 팔을 벌리고 관광객을 환영했다. 하얀 솜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듯 했다.

수덕사는 덕숭총림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제 7교구 본사다. 총림은 선원과 강원, 율원을 갖춘 종합수행 도량이다. 조계종에는 총림이 5개다.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의 삼보사찰과 수덕사, 백양사다. 그만큼 수덕사는 대가람이다.

수덕사 주차장은 대형과 소형차량으로 구분했다. 대형 주차장은 관광버스들이 주차했다.

나는 소형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빈 곳을 찾아 차를 세웠다. 주차장을 나와 수덕사 방향으로 올라가자 길 양쪽으로 상가가 자리잡고 있다. 음식점과 기념품 등 다양했다.

수덕사는 근대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근대 선종을 중흥시킨 대선사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사진) 법명은 성우(惺牛), 속세의 성은 송)씨였다.

아홉 살 때에 과천 청계사에서 출가하여 한학과 불경을 익혀 1871년에는 동학사의 강사로 추대되었고 따르는 문하가 70~80인에 이르렀다. 서른 살 때인 1879년에 길을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났는데 돌림병이 돈다고 마을사람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에 큰 나무 밑에서 밤새 시달리다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아 새로 발심하였다.

이후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놓아 졸음을 쫓으면서 자지 않고 정진하였다.

그 뒤로 충청남도 일대의 개심사와 부석사를 오가며 후학을 지도하여 선풍을 크게 떨쳤다. 깨달음이 크므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선의 일상화를 추구하여, 한센병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기도 하는 등 일화를 많이 남겼고 파계승 소리도 들었다.

1904년에는 사찰을 떠나 머리를 기르고 유관을 쓰고 이름도 박란주(朴蘭州)로 고치고는 서당 훈장노릇을 하며 살다가 1912425일에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사진)의 일화는 웃음과 더불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마음공부를 하게 해 준다

어느 날 일이다. 경허를 따라 시주길에 나선 만공은 바랑이 무겁자 스승에게 간청을 했다. 당시는 스님들이 탁발을 했다.

스님, 잠시 쉬었다 가시죠

앞서 가던 경허 스님이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네 짐을 무겁지 않게 해 주마

만공은 스승이 자기 바랑은 대신 들어 주려나 생각했다.

그런데 경허 스님은 그게 아니었다.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던 동네 아낙네를 뒤쫒아 가더니 느닷없이 아낙네의 두 귀를 잡더니 ""하며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물동이를 이고 가던 아낙네는 비명을 질렀다. 여인의 비명소리를 들은 동네 장정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소리쳐며 달려 왔다.

저 놈 잡아라

잡히는 날에는 몰매를 맞게 생긴 것이다.

만공은 죽을 힘을 다해 "걸음아 나 살려랴" 하며 도망을 쳤다.

한참 뛰다 뒤를 돌아 보니 뒤쫒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 숨을 돌린 만공이 경허에게 물었다.

스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경허스님이 대답했다.

야 이놈아 다 네 다리 때문이다. 아직도 그 바랑이 무겁느냐

그 순간 만공은 "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의 장난이라는 사실을 깨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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