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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나들이<6> 윤봉길 의사 기념관

여행. 맛집. 일상

by 문성 2019. 5. 1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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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사진)은 덕산온천지구에서 3분 거리다. 도로변에 있어 초행자도 쉽게 기념관을 찾을 수 있다주소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윤 의사의 애족 애국 정신이 살아 숨쉬는 기념관은 사적 제229호다. 윤 의사 유물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했다.

 

기념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반 경. 넓은 주자장이 텅 비어 있었다. 방문 시간이 너무 이른 탓이다.

 

주차장 바로 옆 언덕위에 윤 의사의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윤의사 영정을 모신 사당은 수리중이어서 참배하지 못했다.

 

기념관 입구에 윤 의사 사적비가 서 있다. 사적비를 지나 직선으로 가면 기념관 정문이 나타난다.

 

기념관으로 가는 왼쪽에 윤 의사가 농촌부흥운동을 한 부흥원과 생가인 광현당,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란 뜻으로 4살부터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윤 의사가 민족운동을 한 저한당이 자리잡고 있다.

 

 

기념관은 무료다. 오전 9시부터 관람할 수 있다. 기념관은 윤 의사 연보와 출생, 농민운동 등 발자취와 김구 선생과 만남, 상하이 의거 등으로 구성했다. 기념관 정무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한바퀴 돌면서 윤 의사의 삶을 볼 수 있다. 기념관 안에는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할 때 지니고 있던 소지품과 그가 생전에 쓰던 유품과 서책, 글씨들을 전시했다.

 

 

 

기념관을 나서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25살 나이에 저런 삶을 살수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지난 내 삶을 되돌아 봤다. 나라가 위태롭다면 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음표를 가슴에 담고 기념관을 나섰다. 애국 애족의 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윤 의사는  삶은 굵고 치열했다. 1908년 충산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한 윤 의사는 15살에 배용순 규수와 혼인했다. 19살 때 야학을 개설해 농촌 계몽운등을 시작했고 부흥원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주도했다.  23살 때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오지 않는다는 대장부의 다짐이었다.  

 

24살에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25살인 1932429일 흥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河端)이 사망하고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은 실명, 우에다(植田) 중장을 다리가 잘리는 중상,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는 절름발이가 됐다.

 

윤 의사는 이 의거로 붙잡혀 그해 525일 사형선고를 받고 12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순국했다. 윤 의사 유해는 해방후 1946년 조국으로 봉환해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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