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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22>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0. 7. 2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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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5월 27일 김성진 한국전산원장 등 전산망조정위원 14명에게 임명장을 주었다.


이날 위원으로는 문희갑 경제기획원차관(대통령 경제수석. 대구광역시장 역임). 이상희 내무부차관(내무부장관 역임), 김찬재 문교부 차관. 정영의 재무부차관(재무부장관 역임) ,홍성좌 상공부차관 (현 도심공항터미날 고문) ,장기오 총무처 차관(총무처 장관 역임), 황인수 국방부차관, 오명 체신부차관 (과기부총리 역임. 현 건국대 총장), 권원기 과기처 차관(한국기술교육대학교 총장역임) ,강우혁 청와대 정무2수석(14대 국회의원 역임), 김재윤 한국은행 부총재 등이 임명장을 받았다.

  전 대통령은 87년 7월 15일 상오 10시 청와대에서 국가전산화확대 회의를 주재했다.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선진민주사회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을 다져 나가기 위해서는 정보화 시대에 대비한 국가경쟁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면서 “국가전산화 사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가라”고 지시했다. 전 대통령은 특히 “국민이 컴퓨터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이를 잘 이용할 수 있도록 국민에 대한 컴퓨터교육에 중점을 두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그해 9월. 국가전산망위원회는 사무국을 설치했다. 사무국장은 경제비서실 정홍식 비서관(정통부 차관. LG데이콤 부회장 역임)이 임명됐다.그는 극히 이레적으로 청와대에서 서기관에서 부이사관으로 승진하면서 사무국장을 맡았다. 인사 발령에 전두환 대통령이 최종 재가를 한 것도 드문 일이었다. 

  당시 사무국 관계자 B씨의 말.

“실무는 정비서관이 다 했어요. 홍 비서관은 업무가 많았어요. 사무국장이긴 하나 이 일에만 매달려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국 인력은 각 부처에서 파견을 받았다. 체신부에서는 석호익(현 KT부회장),이성옥 씨(현 한국정보산업연합회 부회장) 등이 파견 근무를 했다. 김원식(정통부 미래정보전략본부장 역임. 현 세종 고문)씨는 상공부에서 파견나왔다가 정보통신부로 자리를 옮긴 케이스다.

  노태우 정부는 전산망조정위원회를 89년 6월 1일 체신부로 넘겼다. 이런 방침은 이미 확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의외의 돌발 사태가 발생해 대통령이 같은 사안에 대해 두 번 재가하는 희안한 일이 벌어졌다.

급박했던 그 당시 상황을 알아보자.

89년 3월 6일.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은 ‘위원회를 과학기술처 주관으로 운영토록 개편코자 한다’는 내용으로 노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 과기처가 업무를 가져가기 위해 문 수석을 움직였다는데 방점을 찍을 수 있었다. 더욱이 과기처 최영환차관(과학문화재단이사장 역임)과 문 수석은 경북고 동문이었다. 서류 기안자는 구본영 경제비서관(대통령 경제수석. 과기처 장관역임. 작고)이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기술비서관실은 발칵 뒤집어 졌다. “어째 이런 일이...” 당당 비서관도 모르는 일이 벌어졌으니 기각 찰 일이었다.

  정홍식 비서관(사무국장 겸임)은 2007년 펴낸 자서전 ‘한국IT정책 20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과학기술비서관도 모르게 노태우 대통령이 결재를 한 바 있다. 과학기술처의 요청에 따라 IT정책을 잘 모르는 매크로 담당 비서관들이 건의했다고 나중에 알려졌다. 만일 그 결재대로 진행됐다면 우리나라의 정보화는 그들 부처가 주도했을 것이다.”

  이 시각 체신부 차관실.

신윤식 차관(데이콤사장. 하나로통신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이사장)도 위원회가 과기처로 넘어간다는 긴급한 보고를 받았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신 차관의 당시 상황 설명.

“ 문희갑 경제수석이 그와 경북고 동문인 과기처 최영환 차관(과학문화재단 이사장 역임)의 로비로 위원회를 과기처로 이관키로 했다는 것입니다. 즉시 문 수석에게 면담을 신청했어요.”

  신차관은 문 수석과 공군장교로 근무할 때부터 안면을 턴 사이였다. 고시는 문 수석이 후배이나 군에는 먼저 입대해 신차관이 공군 소위시절 문 차관은 중위였다. 신소위가 근무하는 부대에 대한 후방지원을 하는 부대에 문 중위가 근무했다.

  그런 관계로 신차관이 우정국장 시절 당시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이던 문실장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당시 우체국 증설 등 사업 예산이 삭감되자 그에게 1시간여 사업의 필요성을 브리핑해 예산을 3배나 늘린 적도 있었다.

“ 알고보니 그의 부친이 대구 지역에서 35년간 우체국에서 근무했답니다. 우체국장 관사에서 살았는데 우체국 돈으로 공부를 했다고 말을 했어요.”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말다툼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다. 다혈질에다 목청이 큰 신 차관은 매섭게 따졌다.

“아니 이미 체신부로 오게 된 것은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동안 체신부에서 일을 다 한 것 아닙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

문 수석도 화를 벌컥 내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청와대에는 바보만 있단 말입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지 이게 뭡니까”

이에 신차관은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문 수석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청와대 내부 소식에 정통했던 C씨의 해석.

“당시 청와대에 5공 비리와 관련한 행망 투서가 많이 들어왔어요. 체신부에 대한 일종의 오해에다 과기처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 후 4월 하순 총무처와 상공부, 과기처, 체신부 등 4개 부처 차관은 모임을 갖고 위원회를 체신부로 이관하기로 합의했다. 신차관의 말.

“그것은 일종의 요식 행위였어요. 실제는 청와대에서 다 결정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그해 5월 앞서 재가한 이전 기관을 체신부로 바꾸는 내용의 전산망조정위원회 운영이관 및 위원장 교체 지명 건의라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전담 행정기관이 설치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체신부로 이관하고 위원장도 현재의 홍성철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최영철 체신부 장관으로 교체하며 사무국 인원(15명)은 체신부로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문안중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점담 행정기관이 설치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체신부로 이관하고’란 내용은 정비서관이 적접 넣었다고 한다.

  이런 재가 번복 배경에 대한 정비서관의 회고록 증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한구전기통신공사 때문이었다고 본다. 위원회가 정보화와 정보산업 관련 정책을 추진하려면 그만한 인력과 자금이 있어야 했다. 그런 인력과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이 바로 통신공사였다”

  이 결정은 한국의 IT정책, 즉 정보산업과 정보화 정책의 중심을 체신부로 옮기는 결정적 계가가 됐다. 정부가 정보화 전담 행정기관을 만든다면 그 주체는 체신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위원회가 체신부로 오지 않고 다른 부처로 갔더라면 정보통신부 신설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체신부 이관을 성사시킨 정홍식 비서관은 그해 6월 5일 체신부로 전보발령이 났다. 청와대 근무 10년 3개월이란 기록을 남기고 청와대를 떠났다.

행정 조직의 지각변동은 미래를 향한 새 출발을 의미했다. 체신부는 이런 여세를 몰아 미래부서인 정보통신부 신설에 가속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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