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채 장관은 취임전에 두 가지 정책숙제를 안고 있었다.
청와대의 오더(지시)였다. 하나는 신규통신사업자를 선정할 때 추첨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PCS기술표준으로 CMDA방식을 고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모두 신규통신사업자 허가와 관련한 청와대의 오더였다.
이 장관의 회고.
“청와대가 그런 오더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신규통신사업자 선정에서 추첨제는 절대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방식은 정통부가 스스로 정부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다음은 PCS기술표준으로 CMDA방식을 고집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정책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장관에게 그런 오더를 전한 사람은 한승수 대통령 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이었다.
이런 오더는 곧 대통령의 뜻이기도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대통령의 대리인이며 대통령의 복심(腹心)인 까닭이다.
변화와 경제 마인드를 강조한 이 장관의 정책 행보에 관련업계는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과거 장관들은 전통 체신관료나 아니면 과학자, 정치인 출신이어서 대략적인 정책 구도를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장관은 경제관료인데다 취임초기부터 변화를 앞장서서 주문해 그의 정책 변화를 예측하기가 관련업계로서는 쉽지 않았다.
한해를 역사속에 묻고 96년 새해를 맞았다.
새해는 문민정부에게 정치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우선 4월에 15대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공천작업에 쏠려 있었다. 그해 4월 총선에 청와대 고위인사 3명이 국회로 진출했다. 한승수 비서실장과 한이헌 경제수석, 홍인길 총무수석 등이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15대 금배지를 달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1월1일 ‘세계일류 국가건설의 꿈을 나누며’라는 제목의 신년사를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일류 국가건설을 위해 새 출발을 하자”며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 국민여러분이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대통령은 1월5일 오전 과천 정부 제2청사에서 첫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했다. 나웅배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현 전경련 기업윤리위원장)를 비롯한 경제부처 장관, 이경식 한국은행총재(부총리 역임)와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자금난과 인력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보호와 육성을 위해 중소기업정책을 총괄하는 중소기업청 신설을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김 대통령은 “경제팀은 삶의 질을 높이는 복지증진에 신경을 써 달라”며 “만약 부처이기주의로 정책결정이 표류하거나 지연되는 일은 절대 용납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1996년 1월8일 월요일.
정통부는 96년도 주요업무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5일 경제장관회의에서 이석채 장관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이었다.
이 장관은 대통령에게 신규통신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 공정한 심사기준을 마련해 최대한 엄격하게 심사해 추첨에 의해 사업자가 선정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는 투명성과 공정성을 위해 그동안 정통부가 확정했던 동점일 경우 사업자를 추첨으로 선정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바꾸겠다는 의미였다.
정통부가 발표한 이날 96년 주요업무는 △범국가적인 정보화기반구축 추진△ 초고속정보통신사업의 본격 추진 △ 정보산업의 전략적 육성 △통신사업의 경쟁체제 정착 △ 방송관련 산업의 육성지원 △ 우편서비스의 품질향상 △ 정보통신기술의 고도화 △ 국제협력 활동의 강화△ 전파환경 개선 및 이용질서확립 △ 이용자의 편익증진 등이었다.
이 가운데 업계의 관심은 통신사업의 경쟁체제 정착에 집중됐다. 96년 상반기에 허가키로 한 7개 분야 신규통신사업자와 관련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정통부는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로 능력있는 사업자를 선정하고 대기업 중복신청을 제한해 다수기업의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또 지역사업에는 중소기업 및 중견기업만 참여토록 하고 97년까자 전면적인 국내 경쟁체제를 구축키로 했다.
정통부는 신규통신사업자선정을 추첨하지 않고 서류심사로 선정키로 했다.
이런 정책변경이 훗날 이 장관이나 정통부에 두고 두고 벗을 수 없는 멍애로 작용할 줄은 그 당시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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