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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덕의 정보통신부<351>진대제 , "IT카우보이"

[특별기획] 대통령과 정보통신부

by 문성 2016. 1. 14.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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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대제 장관에게는 인생을 건 도전이자 도박이었다.

당시만해도 삼성전자는 지금의 삼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1985년 삼성에서 4MD램 개발팀장을 맡았다. 그는 밤낮없이 반도체 개발에 진력해 4MD램 시제품을 만들었다. 삼성에서는 1MD개발이 한창일 때였다.

그는 1987년 현지법인에 삼성 본사로 보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때 현대전자 미국 연구소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극비에 접촉해왔다. 그는 삼성에 사표를 내고 주위에 알리지 않고 귀국해 현대반도체와 연구실을 둘러봤다. 정몽헌 회장(작고)도 만났다.

그가 잠적한 것을 안 삼성에서는 난리가 났다. 우여곡절끝에 신라호텔에서 송세창 삼성반도체 사장(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 역임)과 만났다.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줄테니 삼성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진 장관의 말.

반도체 임원으로 발령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임원은 이병철 회장 승락을 받아야 한다며 이 회장과의 면담 자리를 마련해 주더군요

그는 삼성본관 27층 삼성그룹회장실에서 이병철 회장과 면담했다. 그 자리에는 이 회장과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국무총리 역임), 소병해 회장비서실장(작고. 삼성화재 고문 역임)과 진 박사 등 4명만 참석했다.

이 회장과 진 박사는 경남 의령출신으로 동향이었다. 그래서인지 면담 분위기는 훈훈했다. 주로 반도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당초 15분 면담시간이 50분으로 늘어났다. 이 회장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는 198794월 기흥에 있는 삼성반도체 이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 35. 국내 최연소 임원 탄생기록이었다. 이 후 그는 4MD램과 16DM을 개발해 잇따라 개발하면서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창조했다. 그는 삼성종합기술대상은 두 번이나 수상했다.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 낳은 결과였다.

4MD램 개발 성공과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뒷이야기 하나.

퇴임을 20여일 앞둔 198828.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 소장(정통부 장관 역임, ICT총연합회장))으로부터 4MD개발 성공 보고를 받고 정말 기분이 좋다. 저녁에 한턱 내겠다. 반도체개발 연구원들과 삼성. 현대, LG그룹 회장들을 초청하라고 비서실에 지시했다. 이날 청와대는 마주앙을 건배주로 내놓았다.

진 장관의 증언.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반도체 장비를 수입할 때 관세를 면제해 주고 수도권에 공장을 짓도록 허가해 주는 등 많은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만찬장 맨 앞 줄에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 구자경 회장 등이 앉고 나머지는 연구원 명찰을 달고 뒤에 앉았습니다. 전 대통령은 만찬에서 특유의 입담을 자랑했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전쟁나면 과학자들은 대전 이남으로 대피시킬 특별계획도 다 마련해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경상현 소장은 전 대통령이 술값이 모자련 내 머리카락을 팔아서라도 보태겠다고 해 만찬장에 폭소가 터졌다고 회고했다.

진 장관의 말.

“5공 시절 우리집에 경찰이 새콤같은 특수보안장치를 설치해 주었습니다. 집앞에 순찰함을 만들어 경찰이 정기 순찰을 돌았고 집에 들려 이상유무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는 삼성에서 초고속 엘리베이터승진을 거듭했다. 1992년 상무, 1995년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1999년 정보가전총괄사장에 임명됐다. 그는 사장취임식도 기존 관행을 파괴했다. 진사장은 카우보이모자에 콤비양복으로 나타나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디지털미디어사업 총괄의 비전을 발표하는 것으로 취임식을 대신했다.

 

 

200212월 국제가전쇼(iCES)에서 동양인 처음으로 개막기조 연설(사진)을 했다.

 1시간 연설을 위해 그는 6개월간 준비를 했다. 3명의 배우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설을 지도했던 사람으로부터 연설코치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미스터 칩미스터 디지털’ ‘IT카우보이등의 별명을 얻었다. 노력과 열정이 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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