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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 3박4일 베트남 '하롱베이'<3>

여행. 맛집. 일상

by 문성 2016. 9. 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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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일요일>

 

따르릉

아침 6. 모닝콜이 울렸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푹 잤더니 몸이 가뿐했다.

어제 김 반장이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8시반 부터 일정을 시작한다고 예고했다. 그 일정에 맞춰 호텔측에서 모닝콜을 한 것이다.

 

아침 식사 장소는 호텔 1층. 메뉴는 뷔페. 뷔페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곧장 샤워를 하고 아내와 같이 두 아들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보다 일찍 내려온 일행도 있었다. 아직 낯이 설었지만 반갑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메뉴는 다양했다. 빵과 과일. 볶음밥, 김밥 등. 취향에 따라 음식을 골라 먹고 쥬스와 커피를 마셨다.

 

아침 먹고 다시 방으로 올라와 짐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버스가 호텔 앞에서 대기했다.

 

오늘은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 박물관과 그가 살던 주택을 구경하고 한기둥 사원, 호안키엠 호수를 관광하는 일정이다. 김 반장이 호치민 박물관은 관람객이 많아 일찍 가는 게 좋다고 했다.

 

한국인 귀에 익숙한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에게 국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평생을 베트남 독립을 위해 독신으로 살면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베트남과 결혼한 인물이다.

 

 

9시경 호치민 박물관(사진)에 도착했다. 이미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서 입장을 기다렸다.

호치민 박물관을 견학하는데 지나치게 짧은 바지를 입은 여성의 경우 보자기로 아래를 가리게 했다. 아니면 아예 입장을 불허했다. 베트남에서 호치인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엿보게 했다.

 

호치민 박물관은 1990519, 호찌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호찌민의 활동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개관했다고 한다. 구소련의 원조를 받아 레닌 박물관의 전문가가 설계와 내부 장식을 담당했다. 호찌민 생가 모형, 애장품, 편지 등 호찌민 생애와 관련된 모든 물품을 전시했다. 정해 진 길을 따라 줄을 서 박물관에 입장했다. 학생과 일반인이 다수고 외국인도 보였다.

 

이곳에서 한류( 韓流)를 실감했다. 즐거운 경험이다.

베트남에는 한국 드라마와 ,K,탑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한국 탈랜트와 아이돌의 인기는 상상을 추월한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 때문일까.

 

우리 일행이 줄을 서 입장하는데 베트남 일가족이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할머니를 모시고 온 일가족이었다.

그런데 초등학생 쯤 된 여자 어린아이들이 큰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같이 온 아버지와 계속 이야기를 했다. 추측컨대 한국에서 온 연예인 쯤으로 아는 듯했다. 큰 아이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평소 '미남'소리를 들었다. 키가 178cm인데다 피부가 하얗고 몸매도 군살이 없어 날씬하다.

 

잠시 망설이던 그 애 아버지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Where are you from?(어디서 왔나)”

 

앞에 서 있던 큰 아이가 대답했다.

“We come from south korea (한국에서 왔다)”

 

그 말을 들은 베트남 아이들이 눈을 더 빤짝이며 큰 아이를 계속 쳐다보는 게 아닌가.

"TV에서 본 한국 아이돌 처럼 생긴 오빠네" 

 

나중에 아이 아버지가 큰 아이에게 같이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들이 큰 아이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모습이 아직도 영상처럼 남아있다.

아마도 그 어린이들은 기념 사진을 주위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할 게 틀림없다. '한국에서 온 잘 생긴 오빠와 찍은 사진'이라고.  

 

박물관 안에서는 둘째 아이 뒤를 구경 온 베트남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둘째는 키는 큰 아이보다 작지만 피부가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귀엽게 생겼다는 말을 어릴적부터 많이 들었다둘째도 베트남 아이들과 박물관 안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 또한 가족여행의 소중한 추억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언행을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겸손하고 더 예의 바르게 처신해야 한류를 살리고 국위를 선양하는 일이 아닐까?. 이루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 한 마리 꼴뚜기가 어물전 망신시키듯  한 사람의 일탈로 국가와 국민을 욕먹이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될 금기 사항이다.  

 

(이런 한류 경험은 비단 우리 가족만의 일이 아닐 게다. 잘 생기고 귀여운 한국의 젊은이들이 해외, 특히 한류열풍이 부는 동남아에서 흔히 겪는 기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 자식 세대를 보라. 다 조각하듯 잘 생기고 꽃처럼 예쁘다. 어디 내놔도 외모가 뒤지거나 빠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두 아들 자랑이라고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추억은 되새김한다는 점에서 우리 가족에게는 오래 오래 잊지 못한 추억이다.)

 

호치민은 자신이 그토록 외치던 베트남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사망했다.

당시 유언으로 묘지를 만들지 말라. 화장해 남부와 중부, 북부에 가루를 뿌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산 자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후인들은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 호치민 박물관에 안치했다.

 

시신을 방부처리해 안치한 인물은 세계에 러시아 레린과 북한 김일성, 그리고 호치민 뿐이라고 김 반장이 설명했다.   한가지 특이할 점은 호치민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쓴 목민심서를 애독했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자는 듯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둘러 봤다. 시신 주위에 베트남 군인 4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가 국부로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 오직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다 버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고 지도자로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일반인과 같이 청빈하게 살았다.  

 

그는 대통령 관저인 호치민 궁이 아닌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길 옆 2층 집(사진) 에서 살았다. 예전 농촌에서 흔히 보던 원두막을 연상하게 했다. 

 

 

 

집 구조도 소박하고 단순했다 2층 침심은 3평 남짓했다. 한국의 서민 주택보다 초라했다 일국의 통치권자의 집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지도자라면 엄격한 자기 절제없이희생과 솔선수범없이 대중한테 존경받기는 어렵다.  

 

왜 우리는 국부로 존경받는 근대 인물이 없는가. 서로 잘났고 국가 지도자는 자신이 돼야 한다고 목청 높이는데 정작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이가 없으니 서글픈 우리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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