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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향기

여행. 맛집. 일상

by 문성 2010. 1. 2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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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꽃대가 올라오는 구나."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성이다. 창가에 놓아 둔 난에서 이상 징후가 보였다. 오랜만에 난에 물을 주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멀리 보이는 공원에는 지난 번 내린 폭설이 아직 군데 군데 쌓여 있다. 맹위를 떨치던 추위가 한풀 고개를 숙였다. 마음은 봄이 저 만큼 성큼 다가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서민들한테 포근한 날씨는 살림에 큰 부조다. 당장 난방비가 줄어든다. 근래 서울에는 100년 만의 폭설에다 영하 16도의 강추위가 몰아쳤다. 


며칠 전 난을 보니 바싹 말라 있어 화장실로 옮겨 놓고 샤워기로 물을 흠뻑 뿌렸다. 물기가 난에서 쭉 빠지고 난 뒤 창가로 난을 다시 옮겨 놓았다. 잎에 윤기가 나 생기가 도는 듯 했다. 

 

아침 햇살이 부채살처럼 곱게 펴지길래 거실 창가로 다가가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고개를 돌리다가 난으로 눈길이 갔다. 난 사이로 못보던 꽃대가 올라 오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울렁 거렸다. 이 추운 날 난에서 꽃대가 올라 오다니. 나는  진객을 기다리듯 그날부터 날마다 꽃대와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서 올라와라. 그래서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려무나."

당장 난이 고운 자태를 뽐내주기를 고대했건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꽃대는 내가 조급해 하거나 말거나 제 뜻대로 조금씩 키를 위로 밀어 올렸다.

나는 꽃대가 햇빛을 더 많이 받도록 난 화분을 이러 저리 옮겼다. 꽃대가 자랄 때마다 나는 가슴속에 기쁨의 샘이 치솟았다. 생명의 잉태를 보는 느낌이었다. 조물주의 위대함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말 못하는 식물도 누가 보거나 말거나 제 삶에 충실하구나.


드디어 오늘 아침 긴 꽃대가 꽃을 피웠다. 하얀색 꽃잎 바탕에 붉은 점을 찍은 꽃이었다. 마치 연지를 곱게 찍은 새색씨처럼 고왔다.
거실에 아카시아 꽃이 필 때 풍기는 향기가 가득 퍼져 있었다. 인공이 아닌 자연의 향기는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순백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한테서 풍기던 그 향기와 같았다.


난 앞으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리며 그 향기를 가슴 가득히 맡아 보았다.  난꽃의 해맑은 미소와 향기가  내 마음까지 밝고 맑게 순화시켜 주었다. 나도 모르게 환희에 젖어 “허허” 하고 웃었다.
그것은 반가움의 환영사였다. 남들이 보면 “어라 저사람 갑자기 왜 그러나”했을 터이다. 


내가 처음 난을  키울 때 꽃이 피자 덤범대다가 꽃을 질식사 시킨 적이 있다. 꽃이 매마르지 말라며 하루가 멀다하고 연달아 물을 주었더니 웬걸 아름답고 청초하던 꽃이 갑자기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낭패감과 서운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소중한 보물을 내 잘못으로 땅바닥에 내던져 깨뜨린 기분이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의 의미를 그 당시 절감했다.

 
꽃도 시절이 오고 때가 무르익어야 핀다. 난에서 피는 꽃이 인간의 심성을 이렇게 맑게 해 주다니. 난에서 꽃이 안핀다고 가정해 보면  얼마나 서운한 일인가.


거실에 핀 한 송이 꽃이 인간에게 청정함과 아름다움을 선물하고 있다. 아직 봄은 멀었건만 절기에 관계없이 꽃을 피우는 난을 보면서 춥다며 움추려 사는 나를 되돌아 본다. 

인간도 난꽃처럼 향기나는 사람이 돼야 한다. 아무 조건없이 아름다움과 향기를 주는  난 꽃처럼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난 꽃이 오래 오래 내 앞에 머물기를 바라지만 이 또한 나만의 욕심이다.

지족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는데. 그런 점을 알면서도 꽃으로 다가서는 내 마음이다.  창밖에는 아직 녹지 않은 흰 눈이 남아 있다. 그 위를  하얀 햇살이 내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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