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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길목에서 '뽕잎차 한 잔의 여백'

전원일기

by 문성 2019. 4. 1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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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언덕 저 너머, 내가 10살 때 일이다, 햇살이 나른한 봄날 어느 날, 내가 살던 산골 동네 옆집에서 불이 났다.

당시는 새마을운동 전이라 초가에 살았다. 불길은 야수의 시벌건 혀처럼 사납게 날름 거렸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 동네 사람들이 총 출동해 세수대야와 박바가지에 물을 담아 뿌려 불을 껐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검붉은 불길을 보고 놀란 나는 한동안 악뭉에 시달렸다. 밤에 자다가 느닷잆이 불이야소리치며 벌떡 일어나곤 했다. 당시는 몰랐지만 그게 트라우마였다. 얻은 것도 있었다. 이후 꺼진 불도 다시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강원도 산불 현장을 TV로 보면서 잊고 있던 오래 전 화재 기억이 떠올랐다. 정부가 강원도 5개 시.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고 각종 지원책을 마련했다. 각종 구호 손질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평생 가꾼 삶의 터전을 화마에 잃은 주민들의 상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게다. 이분들이 하루속히 일상으로 돌아가길 기원한다.

오늘 아침에 커피 대신 노란색 뽕잎 차를 마셨다. 지난해 봄 아내가 만든 수제차다. 지인이 준 뽕나무를 텃밭에 심었는데 잘 자랐다.

뽕잎이 무성해 질 무렵 아내가 뽕잎으로 차를 만들고 반찬도 해 먹자고 했다. 나는 내심 무슨 맛이 있을까반신반의했다. 뽕잎차를 만들어 차로 마신 일이 없다.

잎이 무성한 어느 날. 아내 채근에 못이겨 뽕나무 햇잎을 광주리에 가득 땄다. 아내는 뽕잎을 수도물에 깨끗히 씻어 물기를 뺀 후 잘게 썰었다. 이어 달군 후라이팬에 뽕잎을 덖어 그늘에 말렸다.

차 맛이 어떨까

물을 끊인 다음 뽕잎차를 다기에 넣어 우려냈다. 차는 맑고 노란색이다. 한모금 머금고 맛을 음미했다. 구수한 게 둥굴레차 맛과 비슷했다. 뽕잎차는 당뇨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아내는 뽕잎으로 반찬을 만들기도 했다. 따뜻한 물에 살짝 데쳐 낸 뒤 양념에 조물조물 무치면 다소 거칠긴해도 먹을 만 했다. 뽕잎으로 부침개도 만들었다. 부침개에 냉막걸리 한 잔 마시면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즐기던 옛 선비들의 기분을 조금 알 듯 하다.

검게 익은 오디를 따 먹으면 목구멍이 달큼했다.

무공해 오디를 맛있게 먹으려나

기대감은 이내 물거품이 됐다. 불청객이 등장했다. 새 떼다. 아침마다 뒷산에서 까치와 참새가 무리를 지어 텃밭로 내려왔다.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몰려 오자 처음에는 새들의 군무(群舞)를 보는 듯해서 좋아했다.

새들이 익은 오디를 몽땅 따먹고 여기 저기 검붉은 배설물을 흘리자 난감했다. 새로 쫒아도 저만큼 갔다가 디시 왔다. 뽕나무 위에 그물막을 칠 수도 없었다.

그래 너희들이나 실컷 먹어라

막상 내 마음을 내려놓으니 편안했다.

뽕잎차를 마시며 세상사 인연법(因緣法)을 생각한다. 뽕나무를 지인이 주지 않았다면, 나무를 언덕에 심지 않았을 터다. 그랬다면 뽕잎을 따 차를 만들지도 않았을 게다. 뽕나무가 없었다면 오디가 열릴 일도, 새들이 날아오지도 않았을 게다.

이 일이 있기에 저 일도 생긴다. 한 세상 산다는 건 인연의 연속이고 파도치듯 쉬지 않고 몰려오는 온갓 번뇌를 잘 다스리는 일이다 힘든 삶이지만 마음에 여백을 남겨야 한다. 봄날 아침 햇살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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