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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지다, 'IT꿈을 안고'

이현덕 칼럼

by 문성 2009. 8. 1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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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했다. 한국 ‘민주주의 상징’이자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그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인간의 힘으로 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인생 역정은 고난과 인내, 극복의 연속이었다. 범인이 감내하기 어려운 삶이었다. 그의 삶을 '인동초'(忍冬草)에 비유한다. 그런 인동초가 영면에 들었다. 그가 남긴 역사의 흔적은 깊고 넓다.

그의 인생살이 86년은 말 그대로 ‘굴곡의 대하 드라마’였다. 대권 사수(四修) 끝에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고, 사상 초유의 'IMF 국가 부도 사태'를 잘 극복한 지도자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면 단연 1997년 12월 대통령 당선이었다. 15대 대선에서 일반인의 예상을 깨고 상대인 이회창 후보를 15만표 차이로 이겼다. 그것은 이변이었다. 그는 1998년 2월 25일 4만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정보화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IT와 관련해 '정보대국의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세계는 지금,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화사회로 나가고 있다”면서 “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어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이고 전제, “이를 적극 육성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며, 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취임후 자신부터 집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했다.  김대중 정부는 임기내 기술입국의 소신을 가지고, 정보통신 정책 추진과 벤처산업 육성에 역점을 두었다.


김대중 정부의 이런 노력에 입힘어 벤처 기업이 급증했다. 게임과 콘텐츠 사업, 네트워크장비 업체 등 정보통신산업과 관련된 벤처들이 눈덩이 불어나듯 증가했다. 이른바 벤처 붐이 일었다.

정부는 당시 장기적으로 “10만개 벤처기업을 육성하고 2002년까지 2만개의 벤처기업을 육성하여 40만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런 목표달성을 위해 정부는 5년간 2조원 가량의 창업자금을 8천여 업체에 지원했다.  그러나 벤처육성책에 부작용도 속출했다.. 일부가 머니게임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벤처는 고위험 고수익의 위험산업이다. 성공률은 3-5% 정도라고 한다. 100개가 창업하면 잘해야 5개 이내가 살아남는다. 이를 간과하고, 기술력이나 창의력도 없이 한탕주의로 어설프게 벤처에 뛰어들어 실패한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벤처기업은 우리 경제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IMF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도전정신, 창의력을 내세운 젊은이들이 벤처 기업에 도전해 성공신화를 만들었다. 이들은 많은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의 전도사 역할을 했다.  


김 전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간 화해협력과 IT교류 협력의 물꼬를 텄다. 이런 성과로 남북 이산가족이 눈물의 상봉을 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운영의 문을 열었다.
그는 이런 공을 인정받아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섬마을 소년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빗길을 하나 씩 건너 뛰었던 김 전대통령은 이제 파란만장했던 삶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지만 생사의 이별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다. 인간의 삶이 이럴진대 인생도 한줄기 스치고 가는 바람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삼가 김 전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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