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윤 체신부장관(사진)의 재임 중 대표작이라면 단연 CDMA 개발이다.
당시 CDMA개발에 대한 반대여론은 큰 파도처럼 거셌다. 다른 부처 반대에다 외국업체의 로비가 치열했다. 국내 업체의 반대도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장관직을 걸고 CDMA개발에 전력투구했다.
그는 틈만 나면 이인학 전파관리국장(데이콤 감사 역임)과 그 후임인 이성해 전파관리국장(정통부 정보화기획실장 역임. 현 큐앤에스 회장)이나 신용섭과장(현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 등과 함께 대전 전자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를 찾아 CDMA개발은 독려했다. 그는 연구원들에게 ‘CDMA개발은 전쟁이다‘라는 문구를 벽에 써 붙이라고 지시했다.
94년 1월부터 개발책임을 맡은 박항구 이동통신개발단장(현 소암시스텔회장)의 증언.
“당시 실험실(STP)이 지하에 있었는데 그 방이름을 'CDMA WAR ROOM'(CDMA전쟁룸)이라고 했어요.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개발에 몰두 했습니다.”
박성득 정보통신정책실장(정보통신부 차관 역임.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의 말.
“그 때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면 우리는 외국 기술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한국이 ‘IT강국’‘휴대폰강국’이 되는 일대 전환점이 CDMA개발 성공입니다”
93년 가을 윤 장관은 국회 교통체신위원회에 나가 CDMA개발과 관련해 국회의원들로부터 호되게 당했다.
여당 간사였던 A의원이 제일 먼저 윤장관을 몰아 세웠다. “왜 개발이 다 끝난 TDMA기술을 놔두고 미래가 불투명한 CDMA를 개발하려고 하느냐. 도대체 이유가 뭐나”고 따졌다. 여당 B의원도 이에 가세했다. 야당 C의원도 윤장관을 매섭게 다구쳤다.
윤 장관은 의원들의 배후에 삼성전자가 있다고 판단했다. 삼성전자는 아날로그 방식을 개발중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윤장관은 이튼날 아침 간부회의에서 삼성의 체신부 출입을 전면 금지시키라고 지시했다. 이날부터 삼성직원의 체신부 출입은 전면 금지됐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보름 정도 지나자 삼성전자 강진구 회장과 김광호 사장이 장관실로 사과 차 찾아왔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앞으로 CDMA개발에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일종의 IT성장통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은 세계 최초의 CDMA기술개발국이란 쾌거를 이룩했다. 세상일은 변수의 연속이다. CDMA개발에 그토록 반대했던 삼성이 지금은 이 기술개발의 최대 수혜자로 휴대폰의 절대 강자가 됐으니 말이다.
93년 12월 10일. 체신부 기자실.
윤동윤 체신부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통사업자 선정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넘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제2이동통신산업자 선정은 노태우 정부시절 최대 쟁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노대통령의 사돈인 선경그룹 최종현회장은 사업권을 반납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후 사업자 재선정문제는 다시 화약고가 됐다.
이 발표가 있기 전 12월 초.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윤 장관은 이통사업자 선정방식에 대해 보고했다.
“각하, 사업자는 전경련에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 이 안이 최선은 아니나 차선은 됩니다”
윤 장관은 전경련에 맡길 경우 예상되는 장점과 단점을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 대통령이 결단하듯 짧게 말했다.
“좋소, 윤 장관 소신대로 추진하시오”
윤장관의 회고.
“이 문제를 놓고 밤잠을 자지 못했어요. 학계와 업계 인사들과 만나 해법찾기에 골몰했는데 누군가가 일본경단련의 예를 소개하면서 전경련에 이 일을 맡기는데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전경련에서 의뢰하면 공정성이나 특혜시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이어 전경련 회장인 최종현 선경그룹회장과 통화를 했다. 최 회장은 그날 행사차 대전에 내려가 있었다.
“최 회장님 이통사업자 선정을 전경련에 의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윤 장관은 그런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처음 당혹해 하던 그도 자초지종을 듣고 흔쾌히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83년부터 4년 7개월간 최장수 통신정책국장으로 일했다. 이 기간 중 IT강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는 1가구 1전화시대를 열었고 통신정책연구소(통신개발연구원. 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설립을 주도했다.
연구원 설립과 관련한 서영길 과장의 계속되는 증언.
“정보통신분야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자는 의미에서 통신정책연구소를 설립했지요. 여기서 정보통신의 확장정책과 서비스, 요금, 경쟁정책, KT민영화, 신규 통신사업자 허가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해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윤 장관의 말.
“경제부처와 회의를 하면 늘 한국개발원의 통계나 자료를 가지고 논리를 폅니다.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어요. 안을 만들어 올렸더니 오명 차관(과기부총리역임. 현 건국대총장)은 금새 결재를 했어요.“
하지만 김성진 장관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며 퇴짜를 놓았다. 윤 국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결재를 올리기를 3-4회나 되풀이 했다. 김 장관은 나중에 ‘인력을 최소로 하라’며 결재를 했다.
윤장관의 공직시작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진해우체국업무과장대리로 첫 발령받아 고향에 가서 부모에게 인사를 하자 실망해 돌아 앉는 것을 보고 크게 분발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윤장관이 전하는 당시 상황.
“ 부친이 ‘어디 발령받아느냐”고 물길래 ’체신부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두 말도 하지 않고 획 돌아 앉아 쳐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앞이 캄캄했어요“
그 후 내무부(현 행정안전부)로 자리를 옮길 뻔 한 일이 있었다.
그의 이모와 A내무부장관 부인과는 사이가 각별했다. 이모는 조카가 진해우체국에 근무하는 것이 안타까워 장관 부인에게 인사청탁을 했다. 그로 인해 67년부터 내무부 치안국 총경으로 옮기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1966년 9월22일 국회 대정부질문 중 김두한의원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미리 준비한 인분을 국무위원들에게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바람에 내각이 총사퇴한 것이다.
그는 퇴임후 ‘성공한 장관’으로 선정됐다. 동아일보사에서 발간하는 신동아는 2001년 10월호에서 고위공무원(대부분 국장급이상)89명을 대상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11개부처 장관을 대상으로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장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여기에 정통 체신관료 출신인 윤동윤 장관이 성공장관으로 뽑혔다.
신동아의 기사 내용을 인용해 보자.
“ 정보통신부를 발족시킬 만큼 통신사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조직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 조직의 갈등요소를 원만히 해결하는 등 조직관리(인사 문제 포함)능력이 출중했다. 무리수를 두지 않고 합리적으로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다.”
김호균 전남대교수도 2004년 펴낸 ‘21세기 성공장관론’에서 윤 장관을 성공한 장관으로 평가했다.
94년 12월 체신부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한국정보문화센터 이사장과 2기 행정쇄신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복지정보통신협의회 이사장과 정우회장, 전직 체신부와 정보통신부 장,차관과 IT원로들의 모임인 IT리더스포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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